본문 바로가기

국외여행/대마도여행

부산에서 대마도 오션플라워호로 1박 2일 대마도여행(12)/나카무라지구 카라이 토스이 생가 방문/이즈하라항/히타카츠항

부산에서 대마도 오션플라워호로 1박 2일 대마도여행⑫

/나카무라지구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방문/이즈하라항/히타카츠항

 

 

부산에서 대마도 오션플라워호로 1박 2일 대마도여행⑫

/나카무라지구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방문/이즈하라항/히타카츠항

 

 

☞ 대마도여행 지난 이야기 - 아래 제목을 클릭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대마도 히타카츠 항까지

② 미우다해수욕장

③ 대마도맛집(정천학)

④ 한국전망대

⑤ 에보시다케 전망대

⑥ 와타즈미 신사

⑦ 만제키다리(만관교)

대마도온천 윳타리랜드와 대마도맛집(만성각)

⑨ 대마도축제(이즈하라항마쓰리 쓰시마아리랑축제)

⑩ 대마도숙박 츠타야호텔

⑪ 수선사 최익현선생순국지비

 

대마도여행 그 열두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8월 5일 오전 9시 55분.

 

최익현선생순국지비가 있는 수선사를 둘러보고, 일본의 유명 소설가인 나카라이 토스이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이즈하라 나카무라지구 거리를 걸어갑니다.

가정집 작은 마당에 소형차를 주차시킨 모습이 꼭 장난감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매물로 내 놓은 땅도 새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나카라이 토스이의 생가에 도착했습니다.

생가의 마당과 실내 모습이 갈끔하게 정리된 모습입니다.

나카라이 토스이의 생애를 적은 안내판을 읽어 보았습니다.

 

 

 

 

나카라이 토스이

만엔 원년(1860) 12월 2일생

다이쇼 15년(1926) 11월 21일 사망

 

나카라이 토스이는 만엔 원년(1860) 12월 2일, 나카라이 탄시로의 장남으로 쓰시마 후추(현. 이즈하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키요시, 어릴 적 이름은 센타로, 기쿠아미, 토스이치시 등으로 불렸다. 집은 대대로 소(宗)가를 섬기는 의사집안이었다.

 

센타로는 아버지의 근무지 부산의 왜관에서 일하다 귀국한 후, 메이지 8년(1882) 16세 때 상경해 영문학학원 '공립학사'에서 공부했다. 토스이는 메이지 15년(1882),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병사의 반란)의 현지보도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메이지 21년(1884) 도쿄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토스이는 이 전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다음해인 메이지 22년 동 신문에 '오시츤보'를 발표하고 이후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히구치 이치요(1872~96)가 소설가 지망 의지를 전하고 지도를 청하기 위해 토스이를 찾은 것은 도쿄아사히신문에 코사후쿠카제가 연재되고 있었던 메이지 24년(1891)으로, 이치요가 20살, 토스이가 32살 이었던 초봄 4월 15일이었다.

 

토스이를 연모하는 이치요의 마음이 25년이란 짧은 생애동안 사라질 날이 없었다는 사실은 사후 발표된 '니키(일기)'에 의해 밝혀졌다. 다이쇼 15년(1926) 11월 21일 사망. 향년 67세. 무덤은 도쿄도 분쿄구 고마고메의 요쇼지 절에 모셔져 있다. 계명은 간제인요코레쓰온코지.

 

 

 

 

 

 

 

2004년 일본의 5000엔 새 지폐에는 나카라이 토스이를 연모했던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히구치 이치요'의 초상화가 실렸다. 히구치 이치요는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다. 죽을때까지 가난으로 힘들게 살았으나, 사후에 화폐에 자신의 초상화가 인쇄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바로 위쪽 사진 오른쪽이 '히구치 이치요'.

 

 

생가 2층에는 작은 도서관과 공부방이 있는데, 사진을 찍으려하자 아이들이 장난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카무라지구 안내

 

나카무라지구는 하치만구신사에 인접한 거리로, 헤이안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무로마치시대는 아비루 씨에 이어 소(宗) 씨가 쓰시마를 지배합니다. 당시의 쓰시마도주 10대 사다쿠니는 거점이었던 미네마치 사가를 떠나 후추(현. 이즈하라)로 옮겨 오닌 2년(1468)에 새 저택(성)을 현재의 쓰시마남경찰서 부근에 세웠습니다. 이 저택은 이후에 '나카무라저택'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섬의 중심지로서 후추의 마을정비가 진행되게 됩니다.

 

현재의 나카무라지구 모습은 간분시대(1660년대)에 무가저택마을로서의 마을만들기 계획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며, 지금도 남아 있는 많은 돌담이나 무가저택의 문 등이 그 당시 무가저택의 분위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으로 유명한 소설가 '나카라이 토스이'나 메이지미녀전(메이지시대 미인들의 일생)에 이름을 남긴 '아라이가미노오츠마'등 저명인사가 이 지구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나카무라지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마을 정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쓰시마 번(藩)과 조선왕조와의 관계

<위지왜인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쓰시마는 깎아지른 듯한 산들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경작에는 별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일본 본토보다도 조선반도에 가까워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도민들은 예로부터 조선과의 무역을 하며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14세기 들어 왜구가 빈번하게 조선반도를 습격하자 그 대책에 골치를 썩힌 조선왕조 정부는 무역 상 특수한 권리와 맞바꾸며 쓰시마 도주 소(宗)씨에게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였습니다. 소씨와 조선왕조는 특별조약(1443년 계해조약, 1512년 임신조약, 1557년 정사조약)을 맺어 독자적인 교류를 하였고, 점차 소씨의 조일무역 독점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두 차례의 조선 침략이 일어났습니다. 소씨는 히데요시의 중신이기도 했던 크리스찬 디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등을 시켜 다양한 평화 공작을 강구하였지만, 히데요시의 야망을 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임진왜란(1592~93), 정유재란(1597~98) 이후 수년간 양국의 단절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쓰시마 번에 있어서는 실로 사활이 걸린 문제로, 종전 다음해부터 소씨는 몇 번이고 사자를 조선에 파견했습니다.

 

 

쓰시마 나카무라지구내 위치한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와 거리를 둘러 보았습니다.

쓰시마 번과 조선왕조와의 관계도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나카무라지구 도보길 여행이었습니다.

 

 

 

부산에서 대마도 오션플라워호로 1박 2일 대마도여행⑫

/나카무라지구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방문/이즈하라항/히타카츠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