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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상지역

예술미와 웅장함이 돋보디는, 장안사 대웅전/부산 기장여행/장안사계곡

예술미와 웅장함이 돋보이는, 장안사 대웅전

공양하며 배운 것 하나, ‘나’가 없으니 ‘너’ 또한 없지 않으랴

/장안사 대웅전/부산 기장여행/장안사계곡

 

 

예술미와 웅장함이 돋보이는, 장안사 대웅전

공양하며 배운 것 하나, ‘나’가 없으니 ‘너’ 또한 없지 않으랴

/장안사 대웅전/부산 기장여행/장안사계곡

 

이 포스트는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 메인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바로가기

 

어렸을 때, 아끼던 물건을 다른 사람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꼭꼭 숨겨 놓은 적이 있었다. 그리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 물건을 어디에 숨겨놨는지 몰랐던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소중하게 여겼던 나의 물건은 결국 나의 것이 되지 못했다. 나 혼자만 차지하겠다는 작은 욕심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음을 늦은 나이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높은 산 속 깊은 계곡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장안사를 찾아가는 길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부산 기장에 위치한 장안사. 우리나라 유명한 고찰처럼 높고 깊은 산을 배경으로 둔 것도 아니요, 전각이 수십여 동을 차지하는 규모가 큰 절도 아니다. 그럼에도 부산지역에서 꽤 알려진 절로 이름 나 있는 장안사를 찾아 간 것은, 땡볕이 쨍쨍 내리쬐던 8월 초.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여정에서다.

 

 

세속과 깨달음의 경계인 일주문. 이 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모든 사찰이 일주문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 터. 각기 사찰의 상황에 따라서 일주문이 있고 없고 차이는 있다. 장안사는 2층 규모의 종각을 안치한 전각이 일주문 역할을 하며, 아래에는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통나무 조각을 한 여느 절의 사천왕 모습이 아닌, 나무판에 섬세한 모습을 새긴 사천왕이 대신 지키고 있다.

 

 

절에 들어설 때 마다 제일 관심이 가는 전각이 있다면 바로 대웅전. 대웅전은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함과 동시 어찌 보면 그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장안사 대웅전 역시 웅장함과 위대함이 여행자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마당아래 석탑으로 이어지는 조화로운 가람형태는 예술미가 한껏 묻어난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그대로 전해지는 한낮.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 앞에서는 독경소리가 여름더위를 그나마 식혀주는 기분이다. 흐르는 땀이 정결한 하얀 겉옷을 적실지언정, 기도에 여념이 없는 신도들의 자세가 진지하다. 무엇을 염원하며 저렇게 기도에 열중할까. 목탁소리는 불자의 몸을 그냥 쉽게 두지를 않는다. 소리와 몸동작이 파도처럼 리듬으로 이어지며, 그 끝이 언제인지, 보는 이로 하여금 애를 태운다. 소리에 경청하고, 몸동작을 구경하는 사람이야 무슨 힘이 들겠는가마는, 행하는 이야 그 얼마나 힘이 들까. 한 동안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알고 보니 이 날이 7월 초파일인것을.

 

 

웃음 머금은 듯 미소 짓는 부처님... 나는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장안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극락전 와불 복장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것. 와불은 ‘누워있는 불상’으로 극락전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와불이 있다. 오른팔을 살며시 굽혀 베게 위에 얹은 채 얼굴을 가벼이 내려놓았다. 웃음을 머금은 듯은 미소는 부드럽고 온화하다. 황금색 옷을 입고 옆으로 편안히 누운 부처님. 편안하게 쉬는 걸까, 깊은 묵상에 잠김 것일까, 궁금할 뿐이다.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했다가, 애장왕(800~809)이 다녀간 후 장안사라 개칭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다포계양식의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은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한국 고건축에 대한 약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대웅전을 처음 접했을 때, 무엇인가 느낌이 전해 옴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건물 폭에 비해 높이가 높고 처마가 깊게 돌출돼 있다는 것. 이러한 건축형태는 평면구조보다는 더욱 웅장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광각사진에서 느끼는 왜곡된 느낌이랄까.

 

 

건축물을 지탱하는 기둥에서 볼 수 있듯, 일부를 수리한 흔적도 보인다. 그럼에도 지금의 대웅전은 몇 차례 수리로 공포 등 외관에 변화가 있었으나, 주요 구조의 자재와 단청 등은 1657년 중창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선 등에도 옛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건축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보존상태도 대단히 양호하고 사찰의 주불전으로서 화려한 수법이 구사된 뛰어난 건축 문화재가 아닐까 싶다.

 

 

 

우연일까, 공덕일까. 이미 알고 간 것은 아니지만 가는 날이 7월 초파일이다. 웬만한 절에서는 음력 초파일과 보름날 공양을 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초파일과 지장재일을 공양일로 지정하여 운영한단다. 줄을 서 기다리며 먹을 만큼 밥을 담아 허기를 채웠다. 이런 곳에서 먹는 밥 한 끼에 무슨 수십여 반찬이 필요할까. 땡초 하나에 된장 조금만 있으면 되는 것을. 김치 한 조각 있으면 더욱 좋을 테고. 참 맛있게도 먹었다. 일식집에서 1인당 5~7만 원짜리 점심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며칠 전, 갖은 양념으로 치장하여 2시간을 소비하며 소 갈비찜을 해 먹었다.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지만, 먹고 나니 허무함을 느낀다. 2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먹는데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하고 있다... 절집에서 느끼는 공양의 의미

 

공양하며 ‘아공(我空)’이란 말의 뜻을 새겨본다.

 

불교에서 ‘아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라고 할 것이 따로 없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거나 기부를 할 때는 아공으로 해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으니, ‘너’라는 것이 없고, ‘도와주는 이’가 없으니, ‘도움 받는 이’도 없는 경지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나누고 나누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세요.

 

선묵 혜자 스님<그대는 그대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가> 중에서

 

 

절터 뒤편 대나무 숲을 걸었다. 대숲에서 우는 바람소리와 매미울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친다. 순도 백 퍼센트 자연의 소리기 때문이리라. 입구에 세워진 ‘원효 이야기 숲’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애사상 화쟁사상(無碍思想 和諍思想)

 

원효대사는 무애와 화쟁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 대중의 길을 포기하고 대중(평민, 천민)들과 함께한 삶을 살았다. 삼국유사 일화 속의 원효대사는 젊은 시절 수행과 교학에 매진하여 대승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통하여 파계한 후 소성거사라 자처하였다. 그러나 요석공주는 비단 요석공주 한 사람만을 칭하는 것이 아닌 대중 모두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왕실과 귀족계층에서만 통용되던 당시의 불교를 대중들에게 직접 다가가 교화하며 살았던 원효대사의 삶을 말하고자 함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뜨거워진 차량의 문을 열기도 겁이 난다. 작은 계곡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텐트를 치고 유유자적한 여가를 보내는 어른들도 평화롭기만 하다. 자연과 함께하는 모두가 행복감이 충만하다.

 

 

장안사에는 보물 제1771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있다. 부산광역시지정문화재로는 제85호(장안사 응진전 석조석가삼존십육나한상), 제86호(장안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제87호(장안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 제88호(장안사 응진전 석가영산회상도), 제89호(장안사 명부전 지장보살도), 제94호(장안사 대웅전 석조삼세불좌상), 제106호(장안사 명부전), 제107호(장안사 응진전)와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장안사 연)가 있다.

 

예술미와 웅장함이 돋보이는, 장안사 대웅전

공양하며 배운 것 하나, ‘나’가 없으니 ‘너’ 또한 없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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