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은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는다

구름이 머물고 있는 절벽, 천년고찰이 하늘 아래 속세를 내려다본다. 죽고 나기를 반복하며 수백 년을 산 소나무는 한결같이 말 없는 친구가 돼 지켜주고 있다. 절터 뒤 큰 바위는 암자가 생겨나기 전부터 수호신 역할을 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정취암을 표현하는 오언시가 입구 안내문에 쓰여 있다. 

절암현정취(絶巖懸淨取) 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산천일망통(山川一望通) 산천이 한 눈에 들어오고
만학백운기(萬壑白雲起) 골짜기에 흰 구름 펴오르듯
구문담진적(扣門淡塵跡) 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찌는 마음 맑게 씻긴다 

  
▲ 봄 풍경 정취암에서 바라 본 산청군 신등면 풍경이다.
산청

하늘에 걸린 듯한 아름다운 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하루 출가를 결심했다. 4월 17일 일요일.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산청. 35번 고속국도 산청나들목을 빠져나와 3번 국도를 지나 60번 국가지원지방도에 들어서 약 7㎞ 지점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도로가 나 있다. 교통통제용 통으로 입구를 막아 놓은 것을 보면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중앙선도 그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 도로가 제대로 나 있는지 의심이 날 법도 하지만 그래도 가 보면 끝은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돌아오면 될 터. 

꼬불꼬불한 길은 좌로 우로 꺾이며 더 높은 곳으로 치닫고 있다. 하늘이 가까워지자 사타구니가 짜릿해 왔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약간 높은 곳에만 가도 느끼는 현상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높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의 경사진 도로지만, 내게는 공포로 다가온다. 운전대를 꽉 잡았다. 잠시 후 차에서 내려 한숨을 돌리고 먼 산과 길 아래 봄 풍경에 한껏 취해본다. 가고자 하는 암자는 큰 바위에 안락한 모습으로 편히 쉬고 있다. 암벽 사이사이로 누워있는 기와지붕은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 매발톱꽃 다른 꽃의 꽃가루를 더 좋아해서 중국에서 매춘화(賣春花)라 부르는 매발톱꽃. 꽃말은 '바람둥이'라고 한다.
매발톱꽃
  
▲ 금낭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금낭화. 바람에 이는 꽃망울이 사랑스럽다.
금낭화

주변이 벼랑이라 경사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도 조심스럽다. 소나무 숲 사이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은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길 언덕에는 매발톱꽃과 금낭화가 나그네를 반겨 준다. 다른 꽃의 꽃가루를 더 좋아해서 중국에서 매춘화(賣春花)라 부르는 매발톱꽃. 그래서 꽃말은 '바람둥이'라고 한다나. 그 옆으로 진한 분홍색 잎을 주렁주렁 단 금낭화 한 송이가 홀로 펴 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금낭화와 바람둥이 꽃 매발톱꽃이 서로 마주 보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다. 지고지순함을 간직한 금낭화는 바람둥이인 매발톱꽃에 곧 낚여 채일 것만 같다. 살짝 바람이 인다. 치맛자락 휘날리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띤 여인이 호기심 많은 청춘을 꼬드기는 모습이다. 

  
▲ 차우차우 중국이 원산지인 차우차우. 사자 갈기 모습을 하고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경계심을 가진 개라고 알려져 있지만, 나그네에겐 무표정하면서도 얌전한 모습이다.
차우차우

절터 입구에 다다르자 누런 큰 개 한 마리가 크게 짖어댄다. 눈을 마주하며 가까이 가자 이내 꼬리 내린다. 산중 절터에 반갑게 찾아온 손님을 몰라보고 짖어대는 개는 아직 깨달음을 못 얻은 모양이다. 조금 떨어진 곳,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다른 개 한 마리가 눈에 띈다. 어찌 볼라치면 사자 모습을 하고 있다. 처음 대하는 생소한 개라 다른 여행객에게 물어보니 '차우차우'라는 중국 개라고 한다. 사자와 곰을 닮은 중국 순수 혈통의 외모에 사자 갈기 같은 털이 유난히 돋보인다. 타인에게 경계심이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내겐 무표정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뒤뚱거리면서 피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암자를 지키는 한국 개와 중국 개 두 마리는 나그네가 불편한 모양이다. 

바람이 쉬어가며 내는 한숨 소리인가, 구름이 머물다 일어서며 내는 기척인가. 원통보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울음을 뱉어낸다. 울음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세상 번뇌를 깨우쳐 주는 깨달음의 소리다.  

  
▲ 풍경 원통보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울음을 뱉어낸다. 울음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세상 번뇌를 깨우쳐 주는 깨달음의 소리다.
풍경

땡그랑 댕댕, 땡그랑 땡땡. 

귓가에 들려오는 맑은 소리는 눈을 밝게 해 주고, 잡념으로 꽉 찬 머리는 말끔히 비우도록 해 준다.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한참이나 그렇게 청아한 풍경소리에 빠져 있다 죽비를 내려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자 수십 년이 넘은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직근성 뿌리를 가진 소나무는 옆으로 뿌리를 뻗쳐 나가기보다는 아래로 뿌리를 내리며 중심을 잡는다. 그래서 웬만한 태풍에도 꺾어질지언정, 뿌리째 잘 뽑히지는 않는다. 바위에 약간의 틈이 있어도 뿌리를 내리는 생명력이 강한 소나무. 그 소나무가 바위 절벽 사이에 정취보살님을 보호하며 동무하고 있다. 

  
▲ 소망 정취암 삼성각에 이르는 길에 쌓인 작은 돌멩이 돌탑. 이 작은 돌멩이 돌탑에는 어떤 소망이 담겨 있을까?
소망

삼성각으로 오르는 길. 담장에는 여러 소원을 담은 작은 돌멩이 돌탑이 있다. 돌 하나, 돌 둘을 놓으며 소원을 빌었을 여행객. 갑자기 태풍이 불어 돌멩이 탑이 무너졌을 때, 그 소원도 무너져 내려 사라졌을까 궁금해진다. 나그네도 돌 하나, 둘을 놓았다. 언젠가 다시 찾았을 때, 온전하게 보전되리라는 꿈은 가지지 않으리. 삼성각 뒤편에는 1833년(순조 33년) 제작된 것으로, 산신탱화(지방문화재 자료 제243호)가 있다. 불화라고 하지만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를 혼합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 뒤편 바위언덕에는 사자를 탄 여래 조각상이 산 아래를 살피며 세상을 평정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 정취보살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정취보살님을 보호하며 정취암을 지켜오고 있다.
정취보살

정취암은 신라 신문왕 6년(서기 686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오래된 절이지만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지방문화재가 하나 있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좌상(지방문화재 자료 제314호). 이 불상은 불신과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낮은 대좌가 하나의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미소를 머금은 부드러운 인상을 보노라면 편안하기 그지없다. 

기와 불사 한 장에 '세상 광명'이라 쓰며 합장 기도했다. 가족의 건강이나 안녕보다는 세상 광명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절터에 오면 편안해지는 가슴이요, 마음이다. 좁은 절 마당에서 아직 새싹이 돋지 않은 잡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산청 신등면 들녘은 푸름이 솟아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붐비는 대형 사찰과는 달리 조용조용한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작은 암자 정취암. 처음 나그네를 반기지 않았던, 국적을 달리한 개 두 마리가 꼬리를 살짝 흔든다. 정취암을 지키는 개 두 마리에 살짝 윙크하며 발길을 돌렸다. 

  
▲ 율곡사 신라시대(651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율곡사
율곡사

나오는 길 인근 율곡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정취암 주차장에서 약 9.5㎞ 떨어져 있는 신등면 율현리에 있다. 이 절은 신라 시대(651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대웅전(보물 제374호), 괘불탱(보물 제1316호), 그리고 목조 아미타 삼존불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 등 문화재도 있다. 절 뒤편 정수산을 찾는 등산객이 가끔 눈에 띄지만 절터는 조용하다. 따뜻한 남쪽지방에 핀 벚꽃은 꽃잎을 다 떨어트려 버렸지만, 아직 이곳은 산중이라 꽃잎이 화사하게 펴 있다. 바람에 하나씩 떨어져 날리는 꽃잎은 내일모레면 다 떨어뜨리고 새싹을 피우리라. 조용한 경내를 묵상하며 걸었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 도성사계곡 도성사 옆 작은 계곡에는 흰 거품을 이는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가고 있다.
도성사

율곡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가 작은 계곡 옆 도성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하루 세 번 절을 찾아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꼭 이런 속설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친김에 가 보기로 했는데, 도로변에서 약 100m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입구 양쪽으로는 소망을 담은 작은 돌탑 몇 개가 서 있다. 규모를 갖춘 큰 절은 아니지만, 소박함이 묻어난다. 기와를 올리지 않은, 어찌 보면 초라해 보이는 약사전 모습을 보니, 여기가 '약사여래기도도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하고 깨달음을 깨우치는데, 기와지붕이면 어떻고, 기와를 닮은 지붕이면 어떨까? 봄 햇살이 절 마당에 쏟아진다. 절이 작아 계곡도 작은 것일까.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도 바위에 부딪혀 흰 거품을 내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큰 강에 흐르는 물도 흰 거품을 내고,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도 흰 거품을 내는 것을 깨달은 여행이었다.

출처 : 사타구니가 짜릿... 구름이 머문다는 사찰 - 오마이뉴스(2011.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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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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