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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거제도/거제 100경

[거제도여행]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도여행코스/거제도 가볼만한곳/6월에 가볼만한 여행지/6월 호국 보훈의 달

 

[거제도여행]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도여행코스/거제도 가볼만한곳/6월에 가볼만한 여행지/6월 호국 보훈의 달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디오라마관.

 

[거제도여행]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도여행코스/거제도 가볼만한곳/6월에 가볼만한 여행지/6월 호국 보훈의 달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숭고하게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거제도포로수용소가 언제 설치됐으며, 포로 수는 얼마나 됐는지, 그리고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에 어떻게 안겼는지 알아본다.

 

▶ 포로수용소 설립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립된 것은 1950년 11월 27일. 한반도에서 동족끼리 총구를 맞댄 지 6개월 여 만이었다. 포로 문제가 유엔군에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1950년 11월 중공군이 한국전선에 개입하면서부터였다. 전체 포로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면서 포로수용으로 조건이 갖춰진 거제도가 대상지로 선정된 것은 1950년 11월. 그 달 27일은 이미 부산 거제리에 임시 수용됐던 포로 일부가 거제도로 이송됐다.

 

한미연합사가 밝힌 한국전 자료에 보이는 거제도수용소 본격 건설은 1951년 2월 1일부터 시작됐다. 2월 말까지 부산에서 이송된 포로는 5만 3588명이었고, 3월 1일 수용소 본부 및 본부병력이 이동됐다. 3월 31일 전체 포로 수는 9만 8799명이었고, 포로급증은 시설의 속도를 앞질러 영구시설물 설치를 불가능하게 했다. 4500명용 단위 수용소에 800~9000명의 수용이 불가피해졌고, 질서, 시설확충 등 포로관리는 대단히 어려웠다.

 

수용소는 옛 신현읍을 중심으로 장평 와치, 용산, 문동, 양정리와 장승포 관할이었던 수월, 해명, 저산, 연초면의 임전, 송정, 남부 저구리, 다포리 및 통영 한산면의 봉암도, 용초도 등지에 1200 정보의 광대한 농토와 임야를 징발, 포로 수용업무가 시작됐다. 거제도 수용소는 4개의 구획 속에 28개의 단위수용으로 분할 관리됐다.

 

1951년 5월 말까지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 수는 1만 5848명, 한 달 후인 6월 말에는 북한군 13만 명, 중공군 2만 명 등 15만 명에 달했고, 이후 2만 명이 더 늘어 최고 17만 명의 포로가 거제에 수용됐다.

 

중공군 포로는 수양동 해명마을, 여자 포로들은 수양동 주자골에 수용시켰고, 악질 포로들은 수양동 영창에 수용시켰다. 포로들의 공동묘지는 연초면 송정리에 있었다.

 

제산마을 앞 들녘에 세워지는 포로수용소.

 

용산마을 앞에 설치됐던 포로수용소.

 

▶ 포로폭동과 송환

 

포로수용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거제도 수용소의 숱한 수용소의 문제점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소장만도 13명이 거쳤으며, 도트 소장 납치사건은 후임 소장 찰리 콜슨 준장을 강등시키는 등 불명예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유엔군 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의 명부상 숫자는 북한군 11만 1754명, 중공군 2만 720명 등 모두 13만 2474명이었다. 반면, 공산군 측이 발표한 유엔군 포로의 명부상 숫자는 한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유엔군 1216명 등 1만 1551명뿐 이었다.

 

유엔군 측 대표들은 공산군이 발표한 포로 수에 어이가 없었다. 북한 측은 일찍이 한국군 6만 5000명 이상을 포로로 뒀다고 보도한 적이 있었고, 또 아군 실종자 통계상으로도 1951년 12월 말 현재 8만 8000명 이상이나 됐기 때문에 그들의 포로 수에 크게 의심을 했다. 미군만도 실종인원을 1만 2000명 이상으로 집계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다. 1952년 6월 현재 포로분류 결과를 보면 전체 12만 8912명 가운데 4만 6976명이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였고, 8만 933명만 송환을 희망했다.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의 대다수는 육지수용소로 이동됐다. 이들은 마산, 광주, 부산, 영천, 논산, 부평, 대구 등지의 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6월 18일 '석방작전' 때 자유민으로 돌아온 수가 2만 7389명이나 됐다.

 

 

 

▶ 석방작전

 

6월 18일 석방작전이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으로 하여금 유엔군의 감시 하에 있던 반공포로들을 극비리에 탈출시키라는 명령에 따라 18일 0시를 기해 각 수용소에서 탈출시킨 작전이다.

 

 

 

한국전쟁의 잔해는 아직도 거제도 땅에 남아 당시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기사 및 사진제공 : 거제시>

 

[거제도여행]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도여행코스/거제도 가볼만한곳/6월에 가볼만한 여행지/6월 호국 보훈의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