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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상지역

[하동여행] 삼신산 쌍계사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사찰여행/국가지정문화재/하동 가볼만한 곳

 

[하동여행] 삼신산 쌍계사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사찰여행/국가지정문화재/하동 가볼만한 곳

 

 

[하동여행] 삼신산 쌍계사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사찰여행/국가지정문화재/하동 가볼만한 곳

 

경남 하동 쌍계사 대웅전 앞에 터를 잡은 탑비.

이 탑은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로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겪은 탓에 탑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부분에 일부가 깨져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탑 전체로 금이 가 있어 온전하게 보존할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래 내용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탑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국보 제47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쌍계사(운수리)

1962. 12. 20. 지정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 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이 비는 신라 정강왕(定康王)(886∼887, 재위)이 신라 말의 고승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774∼850)의 높은 도덕과 법력(法力)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玉泉寺)를 쌍계사로 고친 뒤에 건립한 것으로 최치원(崔致遠)(857∼?)에게 비문을 짓고 쓰도록 하였다.

 

대사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시호는 진감선사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애장왕(哀莊王) 5년(804)에 불도를 닦으러 당나라에 들어가 신감대사(神監大師) 밑에서 중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2년(810)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을 더 도를 닦았다.

 

흥덕왕(興德王) 5년(830)에 귀국하여 상주 모악산 장백사에서 선을 가르쳤다. 다시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대사는 범패(梵唄)에 능하여 그 많은 소리로서 또한 대중을 교화하였음은 유명하다.

 

 

 

 

 

 

 

 

 

 

 

 

[하동여행] 삼신산 쌍계사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사찰여행/국가지정문화재/하동 가볼만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