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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법문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옮겨졌을까?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옮겨졌을까?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이 지금 합천에서 열리고 있다.
매주 토, 일요일과 공휴일 오후 3시부터 30분간 열리는 '대장경 이운행렬'.
이운이란 불상이나 보살상을 옮기어 모시는 것을 말하는데,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행사 기간 중 천년 전 대장경 이운행렬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행렬에 참여를 원하는 단체는 사전 접수를 받는다고 합니다.

♥ 행사기간 : 2011. 9. 24 ~ 11. 5. 매주 토, 일, 공휴일(총14회)/15:00~15:30
♥ 행사장소 : 축전 주행사장
♥ 신청문의 : 홈페이지(http://www.tripitaka2011.com/sub/02_09_02.jsp)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옮겨졌을까?

간절한 호국의 염원으로 이뤄진 팔만대장경의 제작과정은 처음부터 신성함 그 자체였다.

팔만대장경판은 강화경의 대장경판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고려 우왕 7년(1381) 이전, 혹은 조선 태조 7년(1398)경에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태조 7년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운반 과정에는 육로이동과 해로이동 두 가지 설이 있다.

세곡운반로를 따라가는 육로이동설
조선 태조 7년(1398) 5월 10일~12일,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서 한양 용산강을 거쳐 지천사로 옮겨졌다. 잠시 보관되어 있던 경판은 한강, 양수리, 장호원, 여주를 거쳐 대표적인 세곡보관창고였던 충주의 가흥창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조선 시대의 세곡 운반로와 같기 때문에 배만 확보된다면 경판을 옮기는데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새재가 수레가 다닐 만큼 넓어진 것은 조선 후기이므로 당시에는 이고 지는 순수 인력으로 넘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수천 명이 동원 되어야 가능한 일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새재를 넘은 경판은 문경, 점촌을 거쳐 낙동강변에 도착했다. 다시 강배에 실려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서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하여 육로로 해인사로 운반했다.


조운선에 실려 바닷길을 따라가는 해로이동설
조선 태조 7년(1398) 5월 12일 이후에서 정종 원년(1399) 1월 9일 이전의 어느 날, 지천사의 팔만대장경은 한강 용산나루터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졌다. 조선 초기에는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물건을 보관하는  조창과 한양을 왕래하는 조운선이 있었다. 대장경을 해상으로 옮겼다면 짐을 부리고 삼남지방으로 되돌아가는 이 배들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운선에 실린 팔만대장경판은 임진강과 만나는 김포군 하성면을 감싸고 돌아 한강 하구의 유도를 스쳐 강화해협으로 들어가게 된다.

서해안 조곡선의 항로를 따라 만리포, 법성포 앞바다, 임자도 해협을 거쳐 진도의 울돌목, 완도, 고흥반도, 여수를 지나 남해도, 거제도를 통과하여 낙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강배의 6~7배가 되는 바다배로는 강을 거슬러 갈 수 없으므로 낙동강 하구 가덕도 부근에서 100여 척의 강배로 다시 옮겨 실어야만 했다. 김해를 지나 물금, 삼랑진을 거처 낙동강 옛 뱃길을 따라 개경포 나루에 도착했다.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자료집에서)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옮겨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