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신문 2001년 9월 3일 ~ 9월 9일(제494호)


하루동안의 여름 휴가


차일피일 여름휴가를 미루다 아내가 없는 틈을 타 아이와 단 둘이서 우리는 그렇게 때늦은 휴가를 떠났다. 당초 창녕 우포늪 생태관찰을 할 계획이었으나 아침 늦잠으로 인해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랜만에 아이와의 여행이었기에 차창 밖으로 보는 초가을 들녘 풍경은 평상시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으며, 아빠와 단둘의 동행 때문이었는지 아이는 한층 들떠 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진주에 도착한 사실을 그제야 알아 차렸다.


몇 해만에 다시 찾은 진주성은 입구부터 관람객으로 붐볐고 지난날 외세로부터 뼈아픈 침략의 역사와 과거 조상들의 숨은 혼을 그대로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역사의 냄새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국립 진부박물관에서 두 시간여 동안 함께 한 역사공부를 마치자 아이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오리 배를 타고 싶다며 졸라대어 선착장으로 갔지만, 여태까지 놀이기구를 타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왠지 쑥스럽고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이 많은지라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하였고, 이때다 싶어 배가 고프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아이를 꼬여 그 자리를 탈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마음에 오후 내내 아쉬워했어야만 했다.


우리는 시내의 번화가로 이동했고 아이는 롯데리아로 가자고 했다.


“백화점에 뭐 살 것 있니?”

“아니, 롯데리아 가자고 했잖아.”

“방금 롯데리아 백화점 가자고 했잖아.”


실랑이 끝에 아이 손에 끌려간 곳은 백화점이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이 아닌가.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받는 그런 장소를 그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니, 벌써 나이가 들었는지 그들의 문화를 몰라서 그랬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으나 역시 어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늦은 오후 갑자기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흠뻑 젖은 옷에 머릿결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어서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이나 웃었다. 우리는 비도 피할 겸 노래방으로 피신하였고 아이는 아빠의 애창곡을 단번에 찾아 세상 밖을 잠시 잊은 채 어깨동무하며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오직 남자들만의 시간을 뺏기가 두려워(?) 일부러 시간을 잊어버렸고, 가까스로 3~4분을 남겨 놓고서야 통영 행 막차를 탈 수 있었으나, 막상 통영에 도착하니 이미 장승포행 버스는 끊어진지 오래였다.


우리는 차라리 잘 되었구나 하면서 인근 포장마차로 향했고 하루를 마감하는 건배의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서로를 위하여!”


제 또래 녀석들보다 덩치가 좀 작은 아이가 항상 걱정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루사이에 훌쩍 커 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아이는 오늘 하루 무얼 보고 생각하고 느끼며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을 다졌을까? 평소에 잘 해 주지 못한 아빠에 대한 느낌은 어떠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매듭지으며 택시에 올랐고 택시는 어둠속을 가르며 힘차게 달렸다. 아파트 입구에 아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내보다는 우리 집 애견 선이가 더욱 반기었다.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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