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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상지역

동백꽃 핀 매물도가 나를 부른다


'혁신' 한답시고 찾아간 동료들과 찾아간 섬, 매물도

혁신(革新)과 여행.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단어의 만남. 3월의 마지막 토요일(25일)은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혁신'을 위하여 소속 직원 모두가 배를 타고,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작은 섬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에 속한 소매물도. 소매물도는 거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바다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로서, 둥그스레한 언덕 위에 하얀 등대가 서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많은 잡지에 섬 여행지로서 단골로 소개될 정도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 동백꽃, 색깔도 자태도 참으로 곱다. 짝사랑하고 싶은 여인과도 같다.
소매물도는 통영항에서 동남방으로 직선거리로 26km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0.33㎢, 17세대 40여명의 주민이 고기잡이와 해조류를 채취하며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사람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작은 섬이다.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도(일명 글썽이섬) 등 세 개의 섬을 통틀어 매물도라 부르는데, 소매물도라고 하면 등대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안암벽이 장관을 이루는 등대도는 직접 가 보지 않으면 후회할 정도로 아름답다.

▲ 마을 뒷산 너머로 바라보이는 등대도 비경.
일행을 실은 여객선이 소매물도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팀은 세 개로 나뉘어졌다. 매물도 앞 바다 선상 낚시팀, 방파제 학꽁치 뜰채팀, 소매물도 탐험팀 등 제각각 임무수행을 위한 역할 분담이 시작되었다. 탐험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무슨 탐험까지 되겠는가? 그냥 섬을 둘러본다고나 할까.

▲ 정상에서 바라 본 소매물도항과 마을전경. 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매물도의 최고봉인 망태봉에 오르기 위해서, 마을 뒤편으로 나 있는 쉬운 길을 피하고 일부러 산속으로 기어오르다시피 하면서 산을 헤맸다. 무리지어 노는 흑염소 떼가 발걸음소리에 놀랐는지 혼비백산하며 흩어진다. 거의 직각으로 날이 세워진 가파른 암벽을 달리기 경주하듯 도망치는 염소 떼의 모습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발을 헛디디면 바로 천길 낭떠러지 바다로 추락하는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알고서 꼭 즐기는 것만 같다.

▲ 아직 완전히 돋아나지도 않은 풀을 뜯으며 한가로이 노는 염소 떼. 두 마리가 싸움을 하는지 장난을 하는지 앞 다리를 들고 서로 뿔로서 박치기를 하고 있다.
산 정상 주변에 오래 된 폐교가 쓸쓸한 모습으로 옛 추억에 잠겨 홀로 있다. 유리창에는 낙서가 가득하고,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다. 교실은 책걸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운동장이라고까지 할 수 없는 작은 마당에는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웃음소리도 귓가에 맴돈다. 유리창에 써 있는 시 한편을 읽기 위해 한참동안이나 유리창을 뚫어지게 쳐다봐야만 했다.

▲ 망태봉 정상부근에 있는 폐교. 뒤로는 대매물도가 보인다.
망태봉에 오르니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희뿌연 안개 탓인지 하늘은 회색빛이고 바다 빛도 겨울의 쪽빛만큼 푸르지 못하다. 남쪽으로는 대매물도의 뒷모습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하얀 등대가 있는 등대도가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저 멀리 작은 섬이 보인다. 섬이 움직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섬은 더욱 더 커진다. 그런데 섬이 아니다. 유람선이다. 차츰 내게로 다가온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는 유람선에는 무슨 사연을 담은 사람들로 가득했을까?

▲ 역광을 받고 빛나는 동백나무 잎. 유람선이 오가고 있다.
비탈진 산에는 동백나무 수천 그루가 숲을 이루고, 역광을 받은 동백 이파리가 은빛을 쏟아 내고 있다. 그 사이로 붉은 동백꽃이 얼굴을 내밀고 노란 웃음으로 미소 지으며 나를 유혹하고 있다. 그 유혹에 넘어 가 버리고 싶다. 아이와 엄마가 동백꽃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한다. 동백꽃잎 사랑인가 보다.

등대도는 바다 물때를 잘 맞추면 걸어서 넘어 갈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등대섬을 갔다가 되돌아온다. 동백꽃에 반하고 자연에 취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등대도까지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 동네로 내려가야만 했다. 선상 낚시팀이 낚아 온 붉은 볼락(거제도말로 '열기'라고 부름)과 뜰채팀이 뜰채로 잡은 학꽁치가 소쿠리 가득하다. 굽고 회를 뜨고 난리법석이다. 점심을 먹으며 '혁신'을 논의했다. 그러나 모두가 점심 먹기에 정신이 없다.

▲ 소매물도 선착장에는 뜰채로 잡을 정도로 학꽁치가 많다.
여행, 일상의 삶과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연 속에 나를 맡기는 것. 국어사전에서도 정의하지 않는 나만의 해석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만남, 여행과 혁신. 이번 여행을 통하여 너무도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작은 기쁨 하나. 바로 그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아닐까?

▲ 멀어져 가는 매물도. 하얀 물보라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내 자신의 혁신을 위하여, 내 가족의 혁신을 위하여, 내가 소속된 조직과 내 주변 공동체의 혁신을 위한 여행을 떠나 보자.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반드시 찾을 수 있으리라. 문득, 부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깨달음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여행의 깨달음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과 감정, 그리고 만족감이 여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닐까?

▲ 글썽이굴을 배경으로 한 기념사진(왼쪽 중국의상을 한 사람이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