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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거제도

"지리산이 옆집 같았는데..." 이젠 힘들어


거제도 망산에서 봄을 출산하는 소리를 듣다

▲ 푸른 바다를 힘차게 나아가는 봄을 싣고 달리는 배
봄은 벌써 우리들 곁을 찾아 왔건만, 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이상 기온 탓인지 지난 겨울 얼어붙어 있는 마음이 녹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봄이 출산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무수한 자연의 무리들도 잉태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인간들에게 다가 간다.

▲ 저수지 같은 바다
지난 2월 말,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 할 육십 명의 낯선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몇 주나 몇 개월 동안의 교육훈련은 받아 본 경험이 있겠지만,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의 교육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직장이 있고, 쉼터가 있는 거제도를 떠나 창원에서 합숙교육을 한지 보름여 기간 만에 낯선 사람들과 거제도로 여행. 망산에서 봄이 출산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동행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 거제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병대도
언제나 푸른 바다와 섬 그리고 통통배가 하얀 포말을 만들며 지나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섬 거제도. 거제도의 산은 내륙의 그 어느 산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거제도의 산은 거의 바다의 해수면에서 등산이 시작된다. 비교적 내륙의 산은 해발 몇 백 미터부터 시작되는 반면, 거제도의 산은 등산 시작점이 거의 해수면 가까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해발 오백 미터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팔구백 정도의 높이가 된다. 또 하나의 매력은 산을 오를수록 푸른 바다를 조망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내륙의 산과 다르다.

▲ 힘들게 동료를 따라가며,,,
거제도 남부면에 있는 망산, 해발 397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칠년 만에 산을 오르는 탓인지 숨이 가쁘고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오를 수가 없다. 동료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숨은 헐떡거리면서 마음은 조급해진다. 칠년 전, 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든다. 왜? 삼십 후반부터 전국의 명산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산에 미쳐 있었고, 지리산은 집과 가까워 이웃집처럼 다녔으며, 천왕봉만 백회나 넘게 올랐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욱 더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제 체력이 다 했나, 건강에 문제가 있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외로움
숨은 차오르고 마음은 바쁜데 갈 길은 멀다. 동료들과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발길은 천금만금이다. 몇 번이나 헛발을 짚는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굳어지는데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잠시, 내 등치보다 작은 나뭇가지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내 자신이 한스럽다는 생각이 머리끝에 미치자 갑자기 눈물샘이 솟는다. 축축해 지는 눈가. 그리고 흐르는 물기. 갑자기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단편의 가슴 아픈 기억 하나. 지난 이십대 초반, 어린나이에 몸과 마음이 지치던 군 훈련병 시절, 훈련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쉴 때 흘렸던 그 눈물이 생각났다. 그러나 두 눈물의 느낌은 다르다. 군 시절 그때의 눈물은 부모님을 그리면서 흐르는 눈물이었고, 지금의 눈물은 내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짓누른 것이다.

▲ 오른쪽 중간에 길다랗게 보이는 섬, 장사도. 뱀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칠 부 능선에 오르니 쪽빛 바다색이 너무 찐하다. 그러나 하늘은 정반대로 희뿌옇다. 언제나 두 사물(事物)이 서로 마주하며 영겁의 세월을 같이 해야만 하는 존재인 하늘과 바다. 똑 같이 푸른색이지만 오늘 만큼은 하늘이 창백해 보인다.

▲ 거제의 바다
하얀 물살을 가르며 푸른 바다를 헤쳐 나가는 작은 배가 한 폭의 그림이다. 망산(望山)에는 그림 그릴 소재가 수두룩하다. 절벽을 이루는 큰 바위, 종말종말한 작은 섬, 호수같이 고요한 바다, 힘차게 오가는 어선 등 자연과 인간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미련
지난 해 가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수많은 등산객들을 맞이했던 단풍나무는 내 어릴 적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처럼 힘이 없는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다. 다른 나무들은 두터운 겨울 외투를 벗어 버리고 싱그러운 봄옷을 갈아입으려고 준비를 다한 상태지만, 단풍나무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화려함에 취해 아직도 꿈을 못 깨고 있는지, 아니면 계절 감각을 잃어 버렸는지?

▲ 봄이 출산하는 소리
봄은 지난 해 잉태하여 막 출산준비를 다 마친 모양이다. 바위에 귀를 가까이 대어 본다.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 꿈틀거리는 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온다. 봄이 출산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벌써 와서 곁에 머물고 있었지만 내 자신만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 봄의 하모니
봄은 내 마음속에 있었다. 이제는 내 마음속의 봄을 끄집어내 그 진한 향기를 느끼면서 취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