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이 면회 가는 길, 국가안보를 느낀 소중한 시간
▲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부르고 싶은 한탄강
새로운 것을 만나거나 체험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설고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5월 26일, 지난 3월에 입대한 아들을 만나러 강원도 철원으로 떠난 여행은, 68일만에, 아들과 만나는 기쁨과 설레임의 동시작용으로 기분은 평소보다 두 배가 넘쳐흘렀다.

▲ 90년대 많은 비로 인하여 뒤로 보이는 정자까지 물이 차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숙박지를 예약하지 않은 탓에 오후 늦게까지 읍내를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역시, 여행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오후 늦게 고석정 관광단지내에 있는 모텔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북한에서 강원도와 경기도를 관통하여 흐르는 한탄강을 보고서, 곧바로, 느낌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미국 애리조나 북부지역에 있는 거대한 협곡인 그랜드캐니언이었다.

▲ 철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새조각상
며칠 전, 비가 내린 탓에 강물은 석회석을 풀어 놓은 듯 희뿌옇다. 강 아래쪽을 보니 조그만 배가 사람을 싣고 강을 오르내린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몸을 실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상류 쪽으로 오르니 물살이 제법 세다. 강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는 기암괴석의 절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배는 상류로 올랐다가 하류로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하얀 물보라가 이는 아주 작은 높이의 폭포가 보인다. 옆으로 지천이 흐르는데, 이곳이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라고 한다.

▲ 정자에 오르면 한탄강의 비경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래프팅으로도 유명한 한탄강은 깊은 곳의 수심이 5m나 된다고 한다. 강 양쪽 절벽의 제일 높은 곳은 대략 40m 정도가 된다고 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 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한탄강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고석정(孤石亭)은 최근에 건축한 듯, 고풍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뚝배기 그릇에 구수한 된장국 맛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정자에 멋들어지게 쓴 편액도 없다. 그냥 수수하다. 정자 옆으로 잔디밭이 잘 조성돼 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 석탑의 층사이에 금개구리가 살았다는 보물 제223호 도피안사삼층석탑
다음날 이른 아침, 다시 강으로 갔다.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는 어제와 변함이 없다. 인생사, 말없이 흐르는 저 물줄기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동차는 최전방으로 향했다. 아들 면회를 왔건만, 이곳 멀리까지 와서 명소를 둘러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동송읍에 있는 도피안사에 도착했다.

조용한 산사의 아침이 평화롭다. 맑은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마셨다. 상쾌하다. 샘터 옆 안내판에는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했다는 도피안사삼층석탑(보물 제223호)의 금개구리 모습의 사진과 설명이 보인다. 절 마당으로 나아가 금개구리가 살고 있었다던 석탑의 틈새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불심이 없어서일까?

▲ 북한노동당 철원군당사
아침 햇살은 한국전쟁 당시 악명 높았던 북한노동당 철원군 당사의 창틀 사이로 비추고 지나간다. 수리를 하는지 비계를 설치하고 공사가 한창이다. 당사 입구 왼쪽 기둥은 총탄의 흔적이 지금도 선명한 모습으로 그 당시의 뼈아픈 기억을 회상해 준다. 천정과 벽면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뚫려 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증거다. 노동당사에서 잠시나마 전쟁의 아픈 기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민통선 제한구역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물차 몇 대만 오갈 뿐, 한창 모내기가 진행 중인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북한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지만 긴장감은 별로 들지 않는다.

▲ 월정리역
머리에 짐을 인 아낙네와 멋진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제법 멋진 노신사들이 오고가며, 사람들로 북적대야 할 기차역이 너무나 조용하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달리는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월정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월정리역은 수줍은 새색시처럼 말없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아파트 한 채 크기도 되지 않을 역사(驛舍)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을 이렇게 버려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 녹슨 열차는 앙상한 몰골을 한 채 수 십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녹슨 철로에는 이름 모를 잡초만이 무성하다. 외로움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폭격을 맞은 객차는 찌그러지고 녹슨 채 한국전쟁을 대변하고 있다. 철의 삼각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북녘의 땅도 평화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상과 정치를 떠나 여기에서만큼은 철책이 남과 북을 오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다. 저 철조망만 없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155마일의 철책선을 따라 우리나라의 동서를 횡단하면서, 국토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 철마는 달리고 싶다
비무장지대에 고라니 한 마리가 평화로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있다. 철책 사이에 난 구멍 사이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노닐고 있다. 아들 같아 보이는 한 병사가 소총을 든 채 초소를 지키고 있다. 저 병사는 몇 시간을 근무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아들도 내년 삼월에는 저 병사처럼, 민간인의 모습을 자유로이 볼 수 없는, 이곳에서(GOP) 일 년을 근무할 것이라고 한다. 제대하면 그때 한 번 물어볼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은 평화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현실은 아직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다니 참으로 모순이라는 생각이다.

전망대에서 약 15㎞ 떨어져 있는 제2땅굴 견학은 내게 있어 참으로 충격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문이 있은 후 평화무드가 한창일 때 대남 적화야욕에 눈이 먼 북한이 단단한 화강석으로 된, 깊이 50~160m의 지하에 높이 2m, 총연장 3.5㎞의 땅굴을 팠으며, 군사분계선 남쪽 지점으로 1.1㎞나 더 파 내려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굴은 유사시 한 시간 동안 무장병력 1만 6천여 명이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현장으로, 1973년 11월 20일 최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 2명에 의해서 인지되어, 1975년 3월 25일 발견되었다.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사병 8명은 북한이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순화하기도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안내판 앞에서 그들의 영혼에 묵념을 올렸다.

헬멧을 쓰고 땅굴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떨어져 물을 이루고 흘러간다. 북으로 흐르는 것일까? 우리 군이 땅굴을 찾기 위해 시추한 흔적이 보인다. 땅굴 중간에는 작업을 하던 북한군이 먹고 잤다던 넓은 광장도 있다. 허리를 굽혀 십여 분을 걸었을까. 600미터의 땅굴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더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소총을 든 북한군 형상이 노려보는 모습으로 서 있다. 가슴이 섬뜩하다. 땅굴 벽면에는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철원평야를 관통하는 도로
철의 삼각전망대에서 읍내로 향했다. 차량의 거리계기판을 영으로 돌리고 드넓은 철원평야의 직선도로를 달렸다. 일렬로 선 전봇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길까?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녘은 중학교 때 배운 산촌 강원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게, 높은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재배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4.3㎞를 달려서야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끝을 맺는다. 하지만, 도로의 끝이 아니라, 약간 굽어진 형태로 국도 3번 도로는 계속 이어지고, 넓은 평야는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렇게 넓은 평야를 본 적이 없다.

일곱 시간 반을 차를 몰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다. 피곤하지만, 이번 여행의 의미가 가슴 진한 감동으로 영원토록 내 머릿속에 남을 것만 같다.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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