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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아들 사망보험금 전액 기부한 훌륭한 어머니/사는 이야기

아들 사망보험금 전액 기부한 훌륭한 어머니

거제 가조도 김정리 할머니... 2억 넘게 기부

 

김정리 할머니(72세)가 집앞 갯가에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조개를 캐고 있다.

 

“아깝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죠. 아깝다 생각했으면 잠을 못 잤을 테지.”

 

경남 거제도 안, 또 다른 섬 가조도. 이 섬에서 탄생한 ‘기부천사’라 부르는 할머니의 첫 마디는 후회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며칠 전 걸린 감기 탓에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거금의 기부금에 대해 아깝다는 아쉬움은 없어 보였다.

 

지난 주, 지역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이끈 72세의 김정리 할머니. 할머니의 선행은 지난 2001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보험금 전액을, 2011년 사회에 기부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2억 2천 5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10년이나 지난 뒤, 사회에 기부하게 된 사연이 궁금해 할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다.

 

26일. 가조도는 봄 날씨답지 않게 희뿌연 하다. 집 대문은 잠겨 있었고, 할머니는 집 앞 갯가에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조개 몇 개가 든 소쿠리를 들고, 높은 옹벽을 힘들게 올랐다. 집안 거실로 들어서자 찬 기운이 가득하다. 기름 값을 아끼려 집에 보일러를 끈 탓에 방바닥도 차갑기는 매한가지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방에 들어오니 공기도 차고 방도 차갑습니다. 다른 어머니처럼, 아마도 돈 아낀다고 보일러도 꺼 놓은 거 같은데, 적지 않은 돈을 복지재단에 기부하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돈이 없어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티브이에 나오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많이 아팠죠. 그래서 집 전화로 번호를 눌리면 돈이 빠져 나간다고 해서(사랑의 리퀘스트), 평소에도 천원이고 이천 원이고 보태고 했죠. 그러다가 자식들과 의논 끝에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모아도 이런 큰돈을 만지기가 힘든데, 어떻게 기부를 하게 됐는지요?

 

“아들의 교통사고 사망보험금을 타게 되었죠. 그런데 보험금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직장 다닐 때, 넣어 둔 다른 보험금 모두를 보태서 기부를 한 것입니다.”

 

아들이 죽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많이 나죠.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먹고, 쓰는데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자식들도 그 돈을 생활비나 이런데 쓰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러다가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 같은 것을 만들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재단 같은 것을 만들려면, 3억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몇 년간 그런 고민을 하게 됐고,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기부한 총 액수가 얼마이며, 어디에 기부를 하게 됐죠?

 

“총 금액은 2억 5천 5백만 원인데, 제가 살고 있는 이 섬에 있는 창호초등학교에 5백만 원, 바로 인근에 있는 성포중학교에 1천 5백만 원, 적십자사 사랑의 열매에 1억 원, KBS복지재단에 1억 3천 5백만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학교와 복지재단에 2억 2천 5백만 원 기부... 자식들도 반대 안해

 

아들은 어떻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는지, 그 당시의 상황을 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2001년 1월 어느 날(13일)이네요. 새벽 2시 경 사고가 났다고 했어요. 전화연락을 받은 것은 아침 6시경이었어요.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일하러 가지 않고 집에 있는데, 뭐, 다쳤다는 것도 아니고, 바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참으로 하늘이 내려앉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죠.”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네요. 자식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많이 아프겠습니다. 먼저 떠난 아들을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이 있다면?

 

“죽고 나서 화장을 하고 어느 절에 안치를 했죠. 그리고 살았을 때 해 주지 못한 자식의 결혼식이라도 해 주고 싶어, 영혼결혼식도 시켰지요. 그리고 4년이 지난 뒤, 지금은 이쪽으로 데리고 와서 제사를 지내 주고 있어요.”

 

어릴 적, 아들의 모습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참 착했죠. 말썽 한번 부리지도 않았고요. 형이 해야 할 일도 자기가 챙겨서 하곤 했습니다. 집에서 특별히 공부도 안했는데 좋은 점수를 받았고, 활기찬 아이로 자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기억을 더듬는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바로 얼마 뒤, 아들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내 나이 59살 때,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뒤 2년이 채 안 돼서, 아들을 잃게 됐어요. 이런 게 모두 세상사는 일 아니겠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그리고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해서 지내고 있으며, 정부에서 연금 같은 것은 나오는지?

 

“평소 유자차를 자주 마시는데 어느 날 턱 밑이 많이 떨려 병원에 갔는데, 부산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하더군요. 풍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네 번이나 갔고, 내일도 병원에서 오라 해서 가려고요. 뭐, 사는 게 별겁니까. 밭에 심은 작물과 조개 같은 거 캐서 반찬하고, 남편 살았을 때 넣은 국민연금(18만 원 정도)으로 살고 있죠. 국민연금 외에 받는 것은 없습니다.”

 

밭떼기에서 키운 채소와 조개잡이로 반찬거리... 국민연금으로 살아

 

거제도 안의 섬, 가조도. 할머니가 사는 실전마을 풍경이다.

 

남은 자식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지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돈으로 자식들 사는데 보태줬으면...

 

“딸 셋, 큰 아들 모두 결혼해서 그리 넉넉하지 못하게, 모두 어렵게 살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죽은 아들 보험금으로 어떻게 다른 자식들 나눠주고 그럽니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식들이 돈 욕심 내지 않고 어려운 결정을 해 준 게 무엇보다 감사하죠.”

 

기부한 돈으로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과 이 사회에 바라고 싶은 게 있다면?

 

“장학금을 받은 아이들이 훌륭하게 커서, 이 사회에 든든한 기둥이 됐으면 좋겠어요.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고통을 안다고 하잖아요. 내 것을 조금 양보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한 시간여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 평소 심장이 안 좋은데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더욱 심장을 아프게 한다. 할머니가 기부한 돈은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 남동생과 둘만 사는 가장 소녀 등 다양한 계층이 돌봄을 받고 있다. 인터뷰를 요청할 때, 조개를 캐던 빈 소쿠리를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옹벽을 기어 오른 할머니께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오늘도 불안한 마음으로 부산 병원으로 가는 할머니. 큰 병이 아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아들 사망보험금 전액 기부한 훌륭한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