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거제서복연구소 워크숍 열려

우리나라 최남단 아름다운 섬 거제도. 2천년 전, 중국 진시황제 방사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전설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 삶 속에 뿌리내려 있는 전설이야기. 과연, 믿어야 할까, 아니면, 역사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믿어서는 안 되는 허구일까?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이사장 김병원)가 그 의문점을 풀기 위해 서복 워크숍을 열었다. 이 연구소는 지난 27일, 일운면 소동리 웰빙머드펜션 세미나 룸에서 서복에 관한 워크숍을 개최하였으며, 서복에 관한 관심 있는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하여 열띤 관심 속에 진행됐다. 

27일 오후 2시 정각에 개최한 워크숍은 김병원 이사장의 인사말씀에 이어, 거제대학 이 헌 교수의 특강으로 저녁 7시 30분에야 마칠 수 있었다. 장장 5시간 30분 간 진행된 워크숍은 제1주제인 고대사 특강과 제2주제인 서복 특강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제1주제인 고대사 특강은 우주와 태양계를 비롯한 인류의 기원에 대한 강의로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한민족은 무리사회(가족), 마을사회(씨족) 그리고 고을사회(부족)라는 단계를 거쳐 국가사회를 이뤘다면서, 무리사회는 구석기시대, 마을사회는 전기 신석기시대, 그리고 고을사회는 후기 신석기시대이며, 국가사회는 청동기시대라고 규정했다. 고대사 특강은 2천년 전, 서복이 거제도에 불로초를 캐러 찾아왔다는 전설에 대한 의미를 짚어보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제2주제인 서복 특강은 실제로 거제 지역과 관련된 강의로서, 해금강과 와현마을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이야기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 국내에서 서복에 관한 전설 이야기는 대표적인 곳이 제주도와 남해 그리고 거제지역이 중심이다. 

각 지역별 서복과 관련한 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라는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시로미는 한라산 1700m 이상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 한 식용과실이라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 암벽에 새겨진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전해진다. 

  
▲ 서복워크숍 지난 27일 열린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이사장 김병원) 워크숍에서 거제대학 이 헌 교수로부터 고대사와 서복에 관한 특강이 장장 5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됐다.
서복

이 교수는 19세기말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바위에 이 글자가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암각화는 폭포 위 전분공장의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남해군 미조면 설리마을은 남해를 떠나기에 앞서 해변암석에 떠난다는 표지를 남겨, 설리를 '서리고적(徐吏古跡)'이라 하며, '서리곳'이라 불렀다 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서복의 또 다른 이름)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어서 서복에 대한 한·중·일의 주장에 대해서도 특강은 계속됐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제1설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서복의 최종 도착지는 일본이다. 또 다른 설은 18세기에 조작한 것이다. 서복은 일본에 온 적이 없다는 것. 중국은 제1설로서, 일본 주장이 맞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서복은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 입장일까? '강호사학'에는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 

다섯 시간이 넘는 긴 특강에서 이 헌 교수의 결론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펴면서도 진지한 모습이다. 거제도와 서복에 관한 연구를 하는 단체에 대한 진심어린 고언일까? 이 교수의 결론은 이렇게 맺는다. 서복이 동도(동해 쪽으로 항해) 하였을 당시 항해술이 어떤 것이었으며, 한중일 간의 해류는 어떠했는지. 서복이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었던 문자는 무엇이었는지. 남해석각의 위치, 불로초의 진실은 무엇인지. 왜, 지금 서복문화에 관심이 높고, 한중일 세 나라가 서복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 역사의 전설화와 실체를 찾는 노력과 진시황제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의 역사적 인식과 사명은 무엇이며,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 오랜 옛날, 인류가 생겨나고 공동체 생활을 했던 시절. 의식적 행동이었든, 삶의 한 방식이었든 간에, 최초의 인류는 삶의 기록을 흔적으로 남겼다. 벽화라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 벽화를 이해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아주 해박한 지식으로. 동굴 벽화가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 많은 전설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사실이다. 문자가 없던 아주 오래된 시절, 우리는 당시 삶의 기록을 어떻게 남겼을까? 할머니가 자식에게, 자식은 그 손자에게, 그 손자는 그 다음 자손에게. 구전에서 구전으로. 어느 날 문자가 생기고, 구전된 이야기는 진실(?)로서 문자로 기록된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 내려 있는 전설 이야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서복은 중국 최초 황제인 진시황제의 방사로 불로장생을 꿈꾸는 황제를 위해 영약인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두 차례에 걸쳐 동도를 했다는 실존 인물로서, 중국 통사인 사기(史記) 중 '진시황본기'에서 전하고 있다. 

거제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서복에 관한 이야기. 지금으로서, 이렇다 할 역사적 근거와 자료는 없는 현실이다. 문자가 없던 시절의 진실 찾기 이야기는 그래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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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병원 2012.11.19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한 부분으로 지역의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올바른 역사를 물러주어야 할것입니다. 고생하시는 정도길님의 활동에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 이사장 취임식
서복

2200여 년 전, 진시황제의 방사 서복이 거제도에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전설이야기가 현실속의 이야기로 기록되고 후세에 전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전설 이야기를 연구하고 탐사활동을 펼칠 단체가 설립됐기 때문.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 지난 10일, 김병원(거제시요트협회장, 해성고등학교 교사)씨를 이사장으로 선임하면서, 전설 속 현실 찾기 이야기는 제 궤도에 올라 제격에 맞게 추진하게 됐다. 

김 이사장은 취임사를 통하여 "2200년 전, 우리나라에 문자가 있었다면 이러한 전설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중국은 그 당시 문자를 기록한 역사서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면서, 이러한 전설 찾기에 적극 나설 것임을 표명했다. 이어서 "저는 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하나를 풀려고 합니다. 거제도의 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서복의 전설 이야기를 탐사하고 연구하여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이 또 다시 2200년이 지난 뒤 문자로서 후손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라면서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 발기인 대회 및 창립총회
서복

이 단체가 설립하기까지는 3년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것도 특별나다. 2006년 4월, 거제시의회 의원을 지낸 윤현수씨가 와현마을 주민 몇 명과 일본 후쿠오카현을 방문하면서 서복의 전설 속 이야기 찾기가 시작됐다. 이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서복유숙지 기념비를 마을 공원에 세우고 연구와 탐사활동에 나섰으나, 단체를 조직하지는 못했다. 이에, 김 이사장을 중심으로 제격에 맞는 연구 활동을 위해서는 조직 구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두 차례의 준비모임을 통하여 이날 법인 설립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게 됐다. 

이날 밝힌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보면, 오는 9월 하순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국제 심포지움에 참가하고,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해금강 일대와 제주도 정방폭포, 남해 금석문 등 현장 조사도 할 계획이다. 그리고 연구 활동을 통한 자료를 정리하여 단체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도 알릴 것이라고 한다.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 이사장 취임식 기념촬영(앞줄 가운데가 김병원 이사장)
서복

이 연구소 이사인 해금강 화랑을 운영하는 신홍규(56세)씨. 그는 "소설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관광 상품을 만드는 지자체가 많다. '춘향전'의 고향 남원, '토지'의 배경 하동, 장수군 흥부축제, 장화홍련전, 심청전, 그리고 변강쇠 등 캐릭터를 이용한 관광 상품을 앞다투어 홍보수단으로 삼고 있는 데 반하여, 우리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복의 관광자원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소 설립 실마리를 제공한 윤현수씨도 "남해나 제주도에서는 서복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늘 연구소 설립으로 서복이야기를 거제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한다면 많은 관광객을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의견을 털어 놓기도 했다. 

"거제서복연구소는 서복이 거제도에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한다면, 거제관광의 커다란 축 하나가 생길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김 이사장. 이날 법인 설립 발기인으로는 서복의 전설 찾기 이야기에 관심 있는 지역 사람 15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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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서불연구회, 오는 9월 중국서 '서불과 거제도의 관계' 논문 발표

  
▲ 서불기자회견 중국서복연구회 방육강 상무이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불

최근 경남 거제지역 한 단체에서 진시황제의 방사 서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중국서복회 핵심 관계자의 거제도 방문으로서, 이 단체가 연구 활동에 큰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그는 중국서복회 방육강(方毓强, 현, 新民晩報 기자) 상무이사. 연합뉴스와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가 7월 6일부터 서울과 대전, 포항 등에서 개최한 세계한인언론인대회에 참석한 후 거제서불연구회를 방문한 것. 

  
▲ 기자질문 중국서복연구회 방육강 상무이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불

지난 10일 저녁, 거제시 일운면사무소에서 서불연구회 관계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터뷰가 진행됐다. 통역관을 대동한 그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밝고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고, 거제도에서 서불과 관련한 연구 활동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거제서불연구회(회장 이무홍)는 2006년 4월 윤현수(전, 거제시의회의원)씨 등 와현 마을 관계자 등이 일본 야메시청을 방문하면서, 서불 연구 활동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 놓는다. 거제지역에서의 서불은 해금강 우제봉과 와현마을(옛 이름 누우래)에서 오랜 옛날부터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지세포우체국에서 15년간 근무하고, 이장도 4년간 지낸 와현 마을 이정옥(81세)씨. 그는 초등학교 다닐 적, 큰 아버지(이이재씨)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한바 있다. "진시황 신하가 해금강에 불로초를 캐러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누우래 마을에서 유숙을 했다. '누우래'라는 마을 이름도 그래서 생겨났다"라는 것이다. "큰 아버지는 해마다 명절 때면,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면서, "큰 아버지는 선대로부터 쭉 전해들은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전해주라는 말씀도 하셨다"고 전했다. 

  
▲ 서불기자회견 중국서복연구회 방육강 상무이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서불

거제문화원에서 발행한 거제문화사에도 서불의 전설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밖에도 해금강이 있는'갈곶'마을에서 서불의 전설 이야기도 꾸준히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해금강 우제봉에 새겨져 있었다는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씨는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암벽이 떨어져 나감으로서 그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을 이장 김옥덕(55세)씨나 관광유람선 선장들의 증언도 일치하는 건 마찬가지. 

다음은 중국서복회 방육강 상무이사와 나눈 인터뷰 내용. 

- 먼저, 어떤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까?

"연합뉴스와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가 주최한 세계한인언론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전 서복에 관한 연구를 20여 년 간 해왔습니다. 서복과 관련 있는 전설과 유적지는 모두 다녀보았습니다. 연구차 다니면서 거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실제 고찰을 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 중국에서는 서복과 서불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요? 중국, 일본은 서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지역에서는 서불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서복과 서불은 동일 인물입니다. 복과 불은 중국에서 'fu'라는 발음으로 동일하게 발음됩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에서는 '徐市'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후에 '徐福'으로 변했습니다. 한자표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면 "市"(FU)의 글자는 한자의 도시 "市" (SHI)시 비슷하여 틀리기가 쉽습니다." 

- 중국에서 서복연구회가 가지는 사회적 위치와 국민들의 관심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중국에서 서복 연구 기구는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A급은 중앙급이며, 중국서복회를 말합니다. 중국서복회는 북경에 설립되어 있으며, 회장은 중국 외교부 부부장급(차관)의 퇴임관료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중국서복회의 초대 회장은 이연경 선생(李连庆)으로 이미 80을 넘었습니다. 그는 중국 주일본대사, 주인도대사로 근무하였고, 현재의 2대 회장 유지강 선생은 주일본 외교관을 역임하였습니다. 5년 전 북경에서 서복연구회 개막식에 중국외교부부장(장관)이 참석하였습니다. B급은 성급, 시급, 현급, 진급의 지방급입니다. 일반적으로 지방의 서복연구회의 회장직은 현지 지방정부의 현임 혹은 퇴임한 부성장, 부시장급의 관직에 계셨던 분이 맡고 있으며, 부회장과 비서장은 상임하며, 공무원 혹은 전문 학자들이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복연구회가 있는 현지 지방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서복을 알고 있는데, 이는 서복 제사 활동 등 다양한 행사를 거대한 규모로 거행하기 때문입니다." 

- 서복이 태어난 곳이 두 곳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어느 지역인지? 또한, 중국에서 서복연구단체가 있는 성은 어느 곳입니까?

"서복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있는데, 크게 두 곳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산동성 용구시(山东省 龙口市)와 강소성 연운강시 감유현(江苏省连云港市的赣榆县)입니다. 또한, 서복과 관련된 성은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东省), 강소성(江苏省), 절강성(浙江省)이며 이들은 모두 연해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참고로, 전설과 유적에 의하면 하북성 창주시 염산현(河北省 沧州市 盐山县)은 서복이 동도 전 동남동녀를 모집하였던 지역입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산동성 교남시(山东省 胶南市)는 진시황이 서복을 맞이했던 곳이며, 서복동도를 시작했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진시황의 행궁 등 유적도 고스란히 남아있죠. 연운강현은 서복의 고향 중 한곳이며, 서복연구회를 현정부내에 설치하여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중국 사람들에게 서복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까? 진시황제의 방사로 불로초를 캐러갔던 단순하게 신하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요?

"서복은 방사이며, 진시황의 신하나 관원은 아닙니다. 각종 학문을 두루 갖춘 학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서복과 관련하여 2천여 글자의 기록이 나옵니다. 중국에서 사기는 그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복은 존재한 분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중국의 문화인, 지식인, 권력가 등 상위계층의 사람들은 서복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습니다." 

- 방사의 지위는 어떤 것이며, 주로 어떤 사람이 임명되었는지요?

"방사는 방사술사라고도 하며 '유방지사(有方之士)'라고도 합니다. 요즘말로 한다면 방술을 가지고 방술을 아는 사람입니다. 방사의 기원은 중국 전국시대(약 2500여 년 전)의 연국(燕国, 지금의 하북성, 요령성), 제국(齐国, 지금의 산동성) 연해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진나라가 점진적으로 흥왕 되기 시작하면서, 진시황시대의 서복은 그 시대 가장 걸출한 방사 중 하나입니다. 방술은 의학, 약학, 방중술(남녀성교의 기술), 신선학, 천문, 지리, 풍수, 점복, 산명(수명을 점치는 것), 농업생산, 항해 등 고대 모든 과학기술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대 중국에서는 방사를 가리켜 '백공기예(百工技艺)'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중국 각 지역에서 서복 관련 연구단체가 몇 개나 되는지, 또한, 조직과 구성인원은 어떤지, 회장, 부회장, 상무이사는 어떤 사람이 임명되는지?

"중국서복회(중국 각 지역 서복연구기관의 모든 회원은 중국서복회에 소속되어 있다.)를 비롯하여 11개의 서복 관련 연구단체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서복회 회장은 중국 외교부 부부장급(차관)의 퇴임관료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회장은 6명이며, 상임이사는 10명입니다. 지방급 회장직은 지방정부의 현임 혹은 퇴임한 부성장, 부시장급의 관직에 계셨던 분이 맡고 있습니다." 

- 한국에서도 몇몇 지역에서 서복과 관련한 연구를 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제도에서도 서복과 관련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일본 사가(佐贺)서복대회 참가 시 이무홍 회장을 만난 이후 거제도에 서복연구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서복이 진황도를 떠나 일본이나 대만을 여행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어느 지역을 여행했다고 추정하고 있는지? 한국도 경유한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는지요?

"서복은 도대체 중국 어디에서 동도를 시작했을까 하는 중국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진황도, 염산, 용구, 교남시의 랑야태(琅琊台), 연운강시의 감유현(赣榆县), 절강성의 자계현, 대산현(岱山县(岛)모두 가능한 지역입니다. 중국의 사서에는(주요하게는 서복의 이야기를 가장 처음 기록된 사마천의 사기) 그저, '서복동도(徐福东渡)'와 '득평원광택 지왕불래(得平原广泽, 止王不来)'란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그 뜻은 "서복이 동쪽을 향하여 바다를 건넜으며, 최후에는 대평원과 대수면의 지방에 다다라 자신을 왕으로 칭하고 다시 중국으로 오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기록에는 일본과 한국의 한자가 출현되지 않았습니다." 

- 한중일 3국이 중국과 일본에서 서복관련 심포지움을 개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국제교류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어느 도시에서 참여하고 있습니까?

"일본서복연구회의 시간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일중서복국제대회가 거행된 적이 있습니다. 중국서복회는 1992년 12월 3일 성립되었습니다. 현재, 한중일 3국 교류에서 한국에서는 제주도와 서귀포시가 참석하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서귀포에서 거행한 한중일 3국 서복대회에서 특별히 중국학자 2명이 참석하였는데, 장양군(张良群)선생과 본인(方毓强)이 참석한 바가 있습니다. 한중친선협회장 이세기 선생이 개막식에 참석하여 연설한바 있습니다." 

- 국제 심포지움에서 발표하는 내용은 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매년 의제를 달리 하고 있는지요?

"서로의 논문을 교환하고, 발표하고 있으며, 자유토론 형태로 진행됩니다. 또한, 각국 연구회에서 연구한 결과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 2009년 9월 26일부터 이틀 간, 중국 절강성 자계시에서 한중일 3국 서복 심포지움을 개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제서복연구회에서는 본 행사에 참가할 계획으로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네, 가능합니다. 거제서불연구회에서도 그간의 연구 활동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국제적으로도 거제도를 알리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향후, 거제도에서도 서복과 관련한 연구 활동은 꾸준히 추진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거제서불연구회를 위하여 조언할 사항이 있다면?

"먼저, 조직한 현지 연구 인력들의 꼼꼼하고 섬세한 자료 수집과 거제도와 서복에 대한 전설과 유적관의 관계를 증명해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문자 상의 최초의 기록은 어디인지, 언제 전설이 시작되었는지, 왜 이런 전설이 있었는지 등의 논문 발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할 것입니다." 

- 지난 6월 27일 일본 후쿠오카현 야메시 부시장과 아카사키 박사 2명을 모시고 서불 관련 좌담회를 개최한바 있습니다. 거제서불연구회도 국제교류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혹시 중국 서복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만약, 거제도에서 행사를 개최하면 중국 서복연구회에서 비용 부분의 지원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가 알기로는 서귀포서복협회에서는 시정부의 협조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서복과 관련하여 관광 상품을 개발하여 외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정부 차원의 시책이 있는지, 또한, 서복과 관련한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행사가 있는지?

"중국에서는(일본에서도 동일합니다) 대대적으로 서복과 관련 있는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복호텔, 서복문화원, 서복의 이름을 명명한 술, 차, 떡, 과자 등입니다. 9월 하순 자계시 또한 서복문화원을 건설하여 각종 관광 상품을 개발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또한, 서복연구 국제 심포지움이 개최되면 많은 외국인이 참여하고, 각종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서 자연적인 축제행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 서불기자회견 중국서복회 방육강 상무이사(중앙)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 정도길
서불

이날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를 옮겨서도 서불에 대한 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김용운(거제시 일운면장)씨는 '와현(臥峴)'이라는 단어 풀이에 남다른 해석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뜻글자인 한자를 풀어쓰면 臥峴(와현)은 신인산견(臣人山見)으로서, 신하인 사람(방사)이 불로초를 캐러 가기 위해 산을 바라보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전설속의 이야기를 한자로 조합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라는 것이다.  

  
▲ 서불회원 중국서복연구회 방육강 상무이사와 거제서불연구회가 인터뷰하고 있다.
ⓒ 정도길
서불

오는 9월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국제 심포지움에서 서불에 대한 연구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과연, 중국 사람들은 거제도와 서불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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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이 동남동녀 3천명을 데리고 떠났던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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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제봉에서 본 해금강 우제봉에는 칡넝쿨이 산을 덮고 있을 정도로 무성히 나 있다.
우제봉

불사불로(不死不老) 꿈을 이루고자 했던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21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첫 황제라 칭하게 했던 최초의 황제. 그는 불로초를 구하러 방사로 일했던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진황도를 떠나게 한다. 서복은 배 60척, 일행 5천명, 그리고 동남동녀 3천명을 이끌고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한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기록으로 기원전 210년의 일이다. 중국에서 이주는 대만을 가리키고, 단주는 일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정방폭포의 서복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를 근거로 단주를 제주도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어 거제도에 있는 서복 연구 단체가 깊은 관심을 가지며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경남 거제도 해금강 암벽에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 필자는 서복연구회(회장 이무홍) 현지답사에 동참하고 길을 떠났다. 참고로 서불은 서복의 다른 이름이다. 

  
▲ 우제봉 해금강호텔 들머리에서 20여 분이면 우제봉에 오를 수 있다.
우제봉

"어릴 적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해금강에 불로초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죠. 실제로 불로초가 있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바닷가 암벽에는 한자가 아닌 문양 형태가 파여져 있었다고 하는데, 어른들은 '서불과차'라고 부르더군요.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파도에 암벽에 새겨진 글씨가 떨어져 나가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해금강(海金剛)이 있는 갈곶(渴串)마을. 99년 7월부터 이장 직을 맡고 있는 김옥덕(55)씨의 증언을 들으며 연구회 팀은 본격 탐사에 나섰다. 

  
▲ 우제봉 절벽 서불과차가 새겨졌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우제봉 절벽
우제봉

우선, 서복이 불로초를 캐기 위해 제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우제봉(雨祭峯)을 탐사하기로 했다. 들머리인 해금강호텔이 있는 곳으로부터 뒷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우제봉까지 0.9㎞. 한 여름 뙤약볕이지만 한적한 오솔길이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이야기하며 다정스레 걷는 데는 정말이지 안성맞춤이다. 뜨거운 태양은 나무 잎사귀와 가지 사이로 비좁게 파고 들 뿐. 아마 친한 친구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시샘하는 듯이 말이다. 정말 편한한 길이다. 

십분 여를 걸었을까. 하늘을 가린 숲은 이내 밝은 태양아래 숨어 버린다.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을 이고 있는 우제봉. 그 아래 길목에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하늘위에 떠 있는 우제봉은 그림 같은 모습이다. 당시 서복 일행도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 우제봉 정상 우제봉에서 선 필자(좌)와 윤종환 거제서복연구회원(비젼타워 대표)
우제봉

발길을 옮겨 우제봉 정상에 도달했다. 앞으로는 해금강 절경이고, 작은 사자바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쉼 없이 바다를 가르며 하얀 물결을 일게 하는 유람선은 바쁘기만 하다. 일행은 해발 130여 미터 정상에 서서 불로초를 캐는 심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갈섬이란 이름에 걸맞듯 칡넝쿨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다. 우제봉 정상 아래로는 절벽이다. 절벽 아래로 바다를 보는 심장은 간이 콩알만 해 진다. 어째, 이런 곳에서 불로초를 캤을까? 불로초는 아무에게나 쉽게 드러내 놓지 않는 수줍은 처녀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그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없게 험난한 곳에서만 자라는 신비의 식물이었을까? 

  
▲ 갈곶마을 우제봉에서 바라 본 갈곶마을
우제봉

암벽에 새겨졌다는 글자를 찾기는 힘들었다. 장비도 부족하고 넓은 면적에서 글자 모양을 발견하기란 어렵다는 생각이다. 다시 발길을 옮겨 배를 타기로 했다. 바다에서 암벽을 탐사코자 했던 것. 우제봉 아래로 펼쳐지는 암벽 면적은 글자를 새겨도 수 십자를 새겨도 남을 만한 크기의 편편한 바닥이다. 망원렌즈와 망원경으로 혹시나 모를 문자를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파편 조각으로 떨어져 나가버린 암벽 일 부분. 떨어져 나간 부분도 족히 30㎡도 넘을 것만 같다. 

  
▲ 우제봉 2200여년 전,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 왔다는 우제봉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우제봉

"분명한 것은 저 앞에 떨어져 나간 부분과 기존 부분의 암벽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약 10~20㎝로 두께로 편 층으로 갈라지듯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육안으로 확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마을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라 동네 사람들은 실제로 믿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다에서 바라 본 우제봉 암벽은 편편하여 문양이나 글자를 새기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음만 먹으면 줄을 타고 암벽에 글씨를 새기기는 별 어려움이 없는 상황. 2200년 전, 과연 이들은 자신들이 지난 흔적을 이곳 암벽에 남겼을까? 너무 오랜 세월이라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번 탐사를 통하여 한 가지 궁금한 의문이 존재한다. 구전을 통하여 오는 이야기지만, '서불과차'라는 말이 왜 이 지역사람들에게 회자될까 하는 점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가 이 지역의 아버지 세대들로부터 왜 구전돼 오는 것일까?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 해금강에 왔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거제 지역의 한 원로 시인을 만났다. 거제문인협회장을 역임한바 있고, 현재는 거제면에서 난 전문 공원을 운영하는 능곡 이성보씨(63·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 그는 2008년 10월 일본 사가현에서 서복연구회 심포지움에서 거제도와 서복이 관련 있다는 역사적 근거를 발표한바 있다.  

  
▲ 서불관련 자료 이성보 거제서복연구회원이 2008년 10월 일본 국제심포지움에서 발표한 해금강과 서불과 관련한 발표자료
서복

그의 발표 자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불과차라는 글씨가 새겨진 우제봉(雨祭峯)을 마을 사람들은 서가람산(徐伽藍山)이라고 부르는데, 가람은 절터라는 다른 말로, 서불이 은둔한 곳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주장이다. 우제봉은 불로초를 캐기 위해 산신과 바다 신께 기우제를 올린 장소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해금강 본 섬 북단에는 사자바위가 있는데, 이 사자암을 옛적엔 '굴레섬'이라 했다고 한다. 굴레는 그네의 사투리로 서복이 해금강의 천년송 바위와 사자암에 그네를 타고 노닐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전한다. 

  
▲ 서불과차란 글자가 새겨졌다는 우제봉 암벽 서불과차가 새겨졌다고 전하는 암벽의 편층이 1959년 사라호 태풍때 떨어져 나간 모습. 암벽의 색깔이나 옆 부분과 비교할 때 암벽 편층이 떨어져 나간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제봉

  
▲ 우제봉 바다에서 본 우제봉. 이곳에 서불과차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우제봉

거제 해금강의 원래 이름은 칡 섬이라고 하는 갈도(葛島)였다. 풍광이 빼어나 바다의 금강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서불과차라는 글자도 이곳에 많은 칡넝쿨을 이용하여 새겼을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현장을 답사하는 이 날 우제봉 근처로는 칡넝쿨이 암벽을 뒤 덮고 있을 정도로 무성했다. 

과연, 그러면 서복이 이곳을 찾았다면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어디서 유숙했을까? 서불과차라는 글자가 새겨진 해금강과 직선거리로 9㎞ 떨어진 일운면 와현(臥峴)마을. 옛 지명은 누우래. 이곳에서는 해금강이 눈앞으로 바로 보이는 지역이다. 누우래는 '눕다'에서 파생된 말로 유숙을 의미하는데, 마을 사람들 다수에 따르면, 서복이 누우래서 유숙하면서 생겨났고, 지금까지 구전돼 오고 있다는 것. 거제서복연구회 이무홍 회장의 증언도 일치한다. 이회장은 2006년 4월부터 일본 야메시 서복연구회와 교류를 통하여 서복이 와현 마을에서 유숙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이끌어낸다.  

  
▲ 해상탐사 배를 타고 우제봉 암벽에 새겨졌다는 서불과차의 흔적을 찾으러 가고 있다. 갈곶마을 김옥덕 이장(좌)이 설명하고 있다.
우제봉

일본 후쿠오카현 야메시에서 서복을 연구하는 서복연구회 아카사키(59·고고학 박사, 야메시청 문화재관리과 계장)씨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는 해금강 암벽에 새겨졌다는 글자를 찾아 여덟 번이나 거제도를 방문한 바 있다. 그리고 2007년 4월, 이 마을 매미공원에 '서불유숙지(徐巿留宿地)'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한일간 교류활동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태풍으로 떨어져 나가버린,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던, '서불과차'의 흔적을 지금에서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연구단체는 역사적인 고증으로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 해금강을 여행했던 길을 꾸준히 찾겠다는 의지다. 오는 9월 26일부터 이틀간 중국 절강성 자개시에서 열리는 '2009 중국 서복문화국제세미나'에는 한·중·일 세 나라가 참여한다. 이 세미나에서 서복과 거제도 해금강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으로 있다고 한다. 

이날 탐사에는 거제도 서복연구회 이무홍 회장을 비롯하여, 윤종환(비젼타워 대표), 김형석(거제문화예술관장), 서화목(연구회 사무국장, Best 입시학원장) 그리고 필자가 동참했다. 그렇다면, 서복이 해금강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는 신비의 식물은 무엇일까? 불로초라 불리는 그 신비의 식물은 다음 회에 실을 예정이다.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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