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거제도/거제도마을소개

'불 꺼진 항구' 장승포, 이젠 꿈을 실현하는 항구로

죽풍 2011. 8. 22. 06:00



 

'불 꺼진 항구'.  거제도 장승포는 한 때, 불 꺼진 항구로 불렸다. 1980~90년대 말까지 장승포의 별명이 돼 버린 불 꺼진 항구. 그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장승포는 아담한 포구가 있는 항구로서, 일제 식민시대 일본인 거주지로 터를 잡고 발전을 거듭한다. 1930년대 방파제가 세워지고 어선이 입출항을 하며 항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물물교류가 성행하고, 정치망 어업기술이 들여오면서 날로 발전하는 장승포. 밤에 불을 밝힌 고깃배로 항구는 불이 꺼질 줄 모르는 도시로 변모해 간다.


1970년대 초. 당시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내가 사는 집과 약 5㎞ 떨어진 장승포를 가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가 위치했던 장승포. 처음 보는 그 동네는 나를 놀래키기엔 충분했다. 초가집만 있던 내가 살던 곳과는 달리, 스레트와 스라브 지붕의 집들이 빽빽했던 장승포였다. 작은 빌딩도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넓은 도로와 거리, 시장골목, 상인들의 모습은 잘 사는 도시였던 셈이다. 


1970년 중반. 내가 살던 고향은 조선소 건립이 본격화 된다. 정든 집과 삶의 원천인 옥토는 불도저에 밀려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변해갔다. 옥수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동네로의 이사. 장승포는 이웃하며 늘 마주하는 동네가 돼 버렸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은 흘러 198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인구가 늘어남과 동시 도시가 발전하면서 1989년 인구 5만의 장승포읍이 시로 승격하는 기쁨을 맞는다. 그 때가 세계속의 한국을 알린 계기가 된, 올림픽이 있던 이듬해인 1989년 1월 1일.

 

작은 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도시발전은 눈부시게 달라진다. 도로를 넓히고 포장길을 만들자 차량 수도 늘어난다. 일제 식민시대로부터 한국전쟁을 지나는 동안 장승포는 삶의 현장에서 뒤쳐지지 않고 숨 가쁜 도시로 제 역할을 다했다. 밤새 불이 켜진 장승포항이었던 셈. 밤에 불이 켜져 있다는 건 살아있는 도시라는 의미.


당시 고향 출신이 대통령이던 시절인 1995년. 정부는 지방자치단체를 통폐합 한다. 지금의 거제시는 그 당시 장승포시와 거제군의 통폐합으로 생긴 새로운 도시였던 것. 시군 통폐합으로 인한 양쪽 주민의 갈등은 청사소재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양쪽의 힘겨운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경남도청과 중앙정부를 오가며 시위를 벌였지만, 시청소재지는 거제군청이 있었던 고현으로 결정 난 것.


이때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한 장승포. 도시발전은 후퇴하거나 주춤거리며 멈춰 서게 된다. 장승포의 밤거리는 한 때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도시가 돼 버렸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불려진 ‘불 꺼진 항구’. 슬픔이 묻어있고, 비아냥거림이 담긴 뜻을 가진 ‘불 꺼진 항구’. 몇 년인지 한동안 장승포는 불 꺼진 항구로 지내야만 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2000년. 그로부터 강산이 한 번 변한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다시 1년의 반을 넘기고 있는 지금의 장승포. 장승포는 새로운 모습으로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1박 2일 촬영지인 동백섬 지심도로 가는 뱃길은 장승포에서만 탈 수 있다. 국내 최고의 시설과 외관을 자랑하는 거제문화예술회관도 있다.


대한민국 명승 2호 해금강과 관광객 설문조사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순위에 꼽히는 ‘외도’로 가는 유람선터미널도 장승포에 있다. 아쉬운 일이 있다면, 지난해 연말 개통한 ‘거가대교’로 인해 장승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


항아리와 비슷한, 아기자기한 모습의 항구를 안고 있는 장승포는 정이 많은 동네. 인간의 정은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중요한 자원 중 하나다. 그 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시로의 기약을 예고하고 있다. 불 꺼진 항구에서, 희망을 품은, 꿈이 실현되는, 항구로 말이다.
 


○ 장승포동(長承浦洞)


영조 45년(1769) 방리 개편으로 장승거리방(長承巨里坊)이라 하였는데, 이는 북쪽 두모(杜母)고개에 장승이 있었으니, 장승거리라 하였으며 고종 26년(1889) 장승리(長承里)로 바뀌어 동 32년(1895) 장승포리 1915년 6월 1일 도령 제20호 법정 동리령으로 법정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部落區制)로 5구(區)를 두었는데, 1961년 10월 1일 행정리가 되어 제반 행정정에 불분명하여 1969년 5월 15일 거제군 조례 제157호로 전래의 고유지명인 구촌(舊村), 신부동(新富洞), 중앙(中央), 장승(長承), 마전(麻田)으로 개칭하였으나,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 장승포시(長承浦市) 설치에 따라 장승포동에 구촌, 신부동, 중앙, 장승마을과 두모동 두모마을을 합쳐서 행정동으로 하여 관하에 7통(統)을 두었다.


마전마을과 일운면 옥림리(一運面 玉林里)에서 편입한 대림(大林) 1동과 2동을 합쳐서 마전동의 행정동을 두고 관하에 5통을 두었다.


. 구촌마을

장승포항의 입구에 위치하여 본래의 갯마을이고 제주도 해녀가 입주한 곳으로 장승포리의 1구였는데, 본래의 구촌으로 하였다.

. 신부동마을

구촌마을 위에 고종 26년(1889) 11월 12일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민이 입주하여 입좌촌이라 하고, 우편소와 시장이 형성되었고, 1930년 방파제를 축조하여 장승포리 2구라 하였는데 광복 후 신부동이라 하였다.

. 중앙마을

장승포리의 5구중 3구라 하였으니 중앙이라는 뜻이고, 초중학교가 있으며, 1953년 5월 27일 거제군청과 교육구청의 소재지로 중앙이라 하였다.

. 장승마을

본래 두모고개 장승거리 밑으로 장승포리 4구였는데, 장승거리의 뜻으로, 장승마을이라 하였다.


○ 마전동


. 마전마을

본래 삼밭이라 하였고, 장승포리 5구로 마전이라 하였으며, 옥포조선소의 배후지역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행정동의 마전동을 분리하였고, 관하에 5통을 두었다.

. 개분지

신부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 귀밋골

삼밭골 동남쪽 구미산에 있는 골짜기다.

. 몽돌개

구촌 동쪽으로 돌아가면 몽돌이 많은 깨끗한 개가 있어 해수욕장이다.

. 뭄넘개골

구촌 동쪽 몽돌개에 있는 골짜기다.

. 삼밭고개

삼밭 서남쪽에서 일운면 옥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

. 숲안마을

신촌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마전초등학교가 있다.

. 신촌마을

삼밭 북쪽에 6.25 사변 때 이북 피난민이 새로운 마을로 마전어린이집이 있다.

. 윤가여

삼밭 남동쪽 구미산의 총바위 북동쪽 바다에 있는 여이다.

. 장승포등대

장승포항의 방파제 끝에 출입하는 선박의 길잡이 등대이다.

. 장승포항

장승개 앞바다를 장승포만이라 하였는데, 고종 26년(1889) 한일통어장정 이후 일본어민의 이주로 입좌촌을 형성하고 어선단의 보호를 위하여, 1930년 방파제를 축조하고, 1935년 10월 1일 이운면(二運面)을 장승포읍으로 승격하여, 읍사무소를 아양리(鵝陽里)에서 장승거리 고개에 옮기고 항구가 되었다. 1965년 6월 25일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되어 항만청, 세관, 검역소, 출입국관리소를 두었고, 수산물 물양장과 여객선 터미널이 건설되어 동부 거제도의 관문 항구이다.

. 찬샘이골

삼밭 위에 있는 골짜기에 찬샘이가 있다.

. 총바위

구미산 동쪽에 총알 모양의 바위가 있다.

. 턱바위

총바위 남쪽에 사람의 턱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출처 : <거제지명총람>, 1996년 12월 31일 거제문화원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