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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거제도

[거제여행] 거제 장승포 100년사 사진에서 역사의 현장을 찾다

[거제여행] 거제 장승포 100년사 사진에서 역사의 현장을 찾다 

 

[장승포산사태] 1963년 장승포항 전경. 해방 이후 장승포는 일본인들의 철수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63년 6월 장승포산사태로 많은 인명을 잃게 되었다. 사진은 그 당시 산사태를 보여주는 항공사진이다.(붉은 원 안으로 산사태 장면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거제여행] 거제 장승포 100년사 사진에서 역사의 현장을 찾다

 

거제도 전체를 놓고 볼 때 동쪽 끄트머리 정 중간에 위치한 장승포. 일본 땅 대마도와 직선거리로 50km. 옛 주민들은 장승개 앞바다를 장승포만이라 불렀다. 고종 26년(1889) '한일통어장정' 이후 일본어민의 이주로, 이 지역은 입좌촌을 형성하고, 어선단의 보호를 위하여 1930년에 방파제를 축조한다. 1935년 10월 1일 장승포지역이 속한 이운면을 장승포읍으로 승격시키고, 읍사무소를 아양리에서 장승거리 고개 마루에 옮기면서 항구 역할을 하게 된다.

 

장승포항은 항내수면적 22만 5000㎡를 가진 항만법상 제1종항. 1965년 6월 25일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돼, 항만청, 세관, 검역소, 출입국관리소 등 국가기관을 두었다. 이후 수산물 유통을 위한 물양장 건설과,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터미널이 들어서게 되면서 거제도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10년 12월 개통한 '거가대교'로 인한, 여객선의 승객 감소로 부산을 오가는 뱃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춘다.

 

장승포 역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은 1963년 6월 25일 오전 8시 5분께 발생한 장승포산사태. 장승포산사태는 1963년 6월초부터 장마가 시작돼 보리수확을 못하고 있던 중, 6월 19일 태풍 '셜리'호의 영향으로, 6월 24~25 양일간 5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로 장승포동 474번지(속칭 굴세미굴)의 주택 6동, 12세대가 완전 매몰 되는 등 주민 61명과 경찰관 9명이 순직한 사건이다.

 

[거제여행] 장승포만에서 조업하는 모습. 1939년 장승포만에서 일본인 어선을 이용하여 조업하는 모습이다. 당시 거제 사람들은 일본인 어장주에 고용되어 값싼 임금으로 착취당해야 했으며, 자주 동맹파업을 결행하기도 하였다.

 

[거제 장승포여행] 일본인 납골당. 일명 '장승포 묘지'는 이운보통학교 뒤쪽에 설치되었다. 장승포의 대자본가 '오따' 집안의 납골당이 큰 규모였는데, 지금도 '오따'의 비석과 납골 단지 등을 볼 수 있다.

 

[거제 장승포] 장승포 신사 본전. 이 신사는 1907년 콘피라신사(바다신)로 출발하여 1925년 10월 건립하면서 가을 축제를 열었다. 1935년 이후 정식 신사로 인가를 받으면서 조선인들도 참여하는 황국신민의 교육장으로 이용되었다. 사진에 나오는 조선인들은 씨자총대로 내선일체에 협력하였다.

 

[거제도] 1930년대 장승포 해안통(1구). 일본인 어민들은 장승포 1구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일명 '해안통'이라고 불렀다. 사진 왼쪽으로부터 제동조선소, 장승포 공회당(현. 회중식당), 도변 조선소 등이 보인다.

 

[거제] 1920년대 장승포 전경. 1904년 일본인들이 어업이주로 장승포에 정착하면서 연간 최대 발동선 2,500여 척과 어민 5천여 명 정도가 장승포항을 가득 메웠다. 1920년대 장승포항은 어선과 값싼 조선인 노동자로 붐볐다.

 

[거제 장승포항] 징병에 끌려가는 장승포 청년들. 1943년 조선육군지원병제 실시로 조선의 청년들이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 사진의 청년들은 혈서로 전쟁승리의 다짐을 당해야만 했다.

 

[거제여행] 모형비행기 날리기 대회. 1942년 6월 이리사무라 소학교 고등과 학생들이 비행기 날리기 경진대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모습이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 전시체제를 운영하면서 학생들까지 전쟁교육과 소영웅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거제 장승포] 장승포 청년들 징병훈련소. 1945년 7월 8일 장승포 장정입영준비 훈련소에서 수료식을 마친 청년들. 일제는 해방되기 직전까지도 징병에 나갈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군사훈련을 가르쳤다. 

 

[대우조선해양] 민족해방운동의 고장 아양. 1919년 이후 거제 민족해방운동의 메카로 불려진 아양과 아주. 이 지역은 거제의 항일과 반제운동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며,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사진은 대우조선이 들어서기 전 모습으로, 원 안이 내가 태어난 거제시 아주동(법정리는 아양동) 일대다. 오른쪽 끄트머리 진한 부분이 이순신 옥포대승첩기념탑이 있던 당등산이고, 그 뒤 우뚝 솟은 봉우리가 국사봉이다.

 

[장승포어시장] 장승포어시장. 1912년 ~ 1926년 장승포 어시장은 거제도 곳곳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어시장은 부산과 통영 다음으로 경남에서 알아주는 큰 곳이었다. 특히, 어시장은 생선을 판매하거나 일본으로 직송하기도 했다. 어시장은 일본인 이주자들의 소유로 운영되었다. 올해가 2012년도이니까, 정확히 100년 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거제도여행] 이운보통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중일전쟁 이후 보통학생들은 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에 일제가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전쟁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자료는 거제시청에서 제공하였으며, 사진을 다시 촬영한 것입니다.>

 

[거제여행] 거제 장승포 100년사 사진에서 역사의 현장을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