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 나타난 자연의 비경, 보리암과 금산/보리암 가는 길
이 처럼 큰 행복을 처음으로 느꼈던 남해여행/남해여행코스
봄꽃은 향기를 전하고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추는 녹색잎사귀는 사람을 집 밖으로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석가탄신일이 낀 3일간 이어지는 휴일. 사람들은 황금연휴라며 즐길 거리를 찾고 있다. 나 역시도 이렇게 좋은 날 집에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런데 어디론가 훌쩍 떠날 채비를 할 즈음, 일기예보는 여행 떠날 마음의 결정을 망설이게 한다.
주말(18일)에는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과 특히, 남부지방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는 것. 그럼에도 비가 오면 어떠랴, 이왕 연휴를 맞아 집을 떠날 것이라면, 내리는 비에 괘의치 않기로 했다. 일기예보대로 17일 저녁부터 쏟아진 비는 18일 아침까지 이어졌다.
극락전.
보물섬이라 불리는 경남 남해. 그간 남해 섬을 몇 번이나 다녀왔건만, 아쉽게도 해수관음 성지로 유명한 보리암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보리암을 비롯하여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그리고 여수 향일암 등이 4대 해수관음 성지로 꼽힌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리암 입구 주차장에는 대형버스를 비롯한 많은 차량들로 넘쳐난다. 매표소까지는 셔틀버스와 승용차를 이용할 수 있다. 단체여행객과 일부 개인여행자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나는 내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숲 속에 난 약 3.2km의 심하게 경사 진 길은 운전하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지만, 스릴감이 넘친다. 길 양쪽 울창한 숲은 밀림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표를 끊고 산길로 접어들자 푹신하게 느껴지는 잘 닦여진 길이 펼쳐진다. 걷기에 정말 편하다.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나뭇잎이 싱그럽다. 부처님 오신 날이 하루 지났건만, 길 양쪽 연등이 빼곡히 달려있다. 연등 밑에 달려 있는 쪽지에 쓴 주소를 보니, 전국 각지의 불자들이 보리암을 찾았구나 싶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등속에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해 있음이 느껴져 온다.
중턱에 올라 맑은 공기를 한 숨 들이켰다. 자욱한 안개는 아름다움 남해 금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태세다. 남해 쪽빛바다도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센 바람이 불라치면 안개를 밀어내고 가까운 기암괴석의 신비스런 모습만 보여 줄 뿐이다. 바로 코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암석은 부처님의 웃는 모습과도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정형화된 조각품인 불상만이 부처일 수는 없을 터. 제 각각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도 부처라 생각하면, 그 바위도 곧 부처라는 생각이다.
기도처로 유명한 남해 보리암, 몰려드는 불자와 여행자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인 보리암. 683년(신문왕 3)에 원효가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하였다고 전한다.
형리암(좌)과 대장봉(우).
주차장에서 걸어 약 800m 지점에 이르니 기념품을 파는 전각이 나온다. 옆으로 보이는 두 곳의 큰 기암괴석이 신비롭다. 형리암과 대장봉이다. 언뜻 보면 신하가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한 형리암, 그 모습을 근엄하게 지켜보는 대장봉의 모습이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두 바위를 보노라면 신선의 세계에 온 듯 하는 느낌이다.
이어 계단 길 끝자락에 보리암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불자와 여행자가 쉼 없이 계단 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어떻게 암석이 많은 이런 산자락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웠을까 궁금하다. 바위로 꽉 찬 산 정상부에서도 샘물은 솟아난다. 보시하는 마음으로 물 한 컵을 떠 마셨다.
바위틈에 자리한 암자라 그런지 널찍한 절 마당은 없다. 그래도 보광전, 영성전, 극락전, 산신각, 범종각 그리고 요사채 등 웬만한 사찰 규모의 전각을 갖추고 있다.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 안내문을 보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 탑은 비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비보는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의 지역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일이라고 한다. 네모진 탑 주변을 두 손 모아 탑돌이를 하는 여행자들. 저들은 무슨 기도를 하며, 어떤 소원을 빌까.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절에 왔을 때만 기도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인다.
보리암은 기도처로도 유명하지만 보리암이 위치한 금산 주변으로는 산세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얼마나 아름다운 절경이 많으면 ‘금산 38경’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런데 모처럼 찾은 금산의 아름다움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신심이 부족해서일까, 짙은 안개로 주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세찬 바람에 안개가 밀려난다. 안개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금산의 비경에 탄성이 절로 난다.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가 안개 속에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해바다는 보여 줄듯 말듯 애를 태운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남해 금산의 비경과 상주은모래해수욕장
“바람아! 조금만 세차게 불어다오”라며 기도하자, 거짓말 같이 안개가 걷히면서 남해 상주은모래해수욕장 모습이 희미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비경도 잠시, 또 다른 안개가 밀려오자 이내 사라져버리는 쪽빛바다와 금산의 비경. 인생사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에서 배우며 깨닫고 있다. 한 동안 안개가 걷히기를 욕심 부려 보지만, 욕심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떴다.
돌아 나오는 길 이정표에 새겨진 표시가 나를 유혹한다. 금산정상 0.2km. 먼 길까지 왔다가 조금만 수고하면 정상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터. 수고하기로 마음먹고, 10여 분을 걸으니 금산 제1경인 망대에 이른다.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5m)에 사방 조망이 넓고 남해바다를 볼 수 있어 망대라 이름 붙여졌다.
이곳에 오르면 금산 38경과 남해의 만경창파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장엄한 일출은 가히 절경이라고 한다.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제일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정상에 오르는 기쁨은 누렸지만, 또 하나의 기쁨은 누릴 수가 없다. 안내문에 적힌 아름다운 풍경과 만경창파를 볼 수 없음에.
남해 금산 38경 중 제1경인 망대.
망대 아래 평평한 터에는 큰 암석이 몇 개가 흩어져 있다. 버선을 닮았다고 부르는 버선바위에는 주세붕이 썼다는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쌍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라는 의미로, 그 옆으로도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상주포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안개로 덮인 금산을 뒤로 하며 발길을 옮기는데 시리대 숲이 나온다. 때 맞춰 부는 바람에 대나무 숲이 울어댄다. 대 숲에 우는 바람소리. 나는 이 소리가 애달프게 좋아 내 블로그 애칭을 ‘죽풍’이라 이름 지었고, 이름도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라 지었다. 처음으로 찾아 간 남해 보리암과 금산은 큰 행복을 주기에 충분했다. 안개 속에 산도 보고 바위도 보았으며, 대나무 우는 소리도 들었기에.
안개 속에 나타난 자연의 비경, 보리암과 금산/보리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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