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 북문루 상량식 현장을 찾아서

급속하게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가 아쉬운 이 때, 고현성(경남 거제시 소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북문루’ 중수공사에 따른 상량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현장을 찾았다. 대청마루에는 상량에 쓰일 목재와 간단한 제례음식이 차려져 있고, 흰색의 깨끗한 광목이 상량을 들어 올리도록 깔끔하게 묶여 있다.

▲ 마룻대에 쓰는 첫 글자, 용(龍)자.
상량식은 집을 지을 때 기둥위에 보를 얹고 마룻대를 올리는 것이다. 집을 다 짓고 난 다음 축연을 베푸는 준공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중요한 의식으로, 이날은 술, 떡, 돼지머리, 북어, 백지 그리고 실 등을 준비하여 주인과 목수 일꾼 등이 새로 짓는 집에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신(地神)과 택신(宅神)에게 제사지내고, 지나가는 행인을 초청하여 축연을 베푼다.

▲ 마룻대에 글씨를 새기고 있다(왼쪽), 교육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윤종인 선생(84세).
상량기문은 정성스레 갈은 먹물을 듬뿍 묻혀 붓으로 쓰는데, 쓰기에 앞서 백묵으로 마룻대에 칠을 한 다음 쓰면, 먹물이 퍼지지 않아 선명한 글체를 볼 수 있다. 보통은 용(龍)자와 구(龜)자 사이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고 쓰는데, 용자는 거꾸로 쓰서 구자와 마주보게 하며, 이때, ‘입주’를 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용(龍)자와 구(龜)자를 쓰는 것은 용과 거북이가 수신(水神)이므로 화재를 예방해 주리라는 속신에서 비롯된다. 그 다음 밑으로 두 줄로 '응천상지오광(應天上之五光),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이란 글귀를 넣어 축원의 뜻을 담기도 한다. ‘오색 하늘빛이 감응하고, 오복을 땅이 준비하다’라는 뜻이다.

마룻대에 글씨를 다 쓰고 나면, 마룻대 앞으로 제상을 차리고 주인이 엎드려 제를 지내는데 이때 상량문을 크게 낭독한다. 상량문이 장문일수록 주인이 엎드려 있는 시간도 그 만큼 길어 벌(?) 아닌 벌을 받기도 한다.

▲ 거제향토사연구소 박병희 소장(81세)이 상량문을 낭독하고 있다.
상량문 낭독이 끝나면 주인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술을 따르고 절을 하면서 부귀공명을 기원하고, 술을 집 네 귀퉁이에 조금씩 부어 축원한다. 마룻대에는 실로서 북어와 떡을 묶어 놓는데, 이것은 나중에 목수와 인부들이 떼어 먹는다. 이어서 흰 광목으로 묶은 마룻대를 올리는데, 이때 목수나 주변의 사람들이 “잘 올라가지 않는다”라고 하면, 주인이 돈을 내 놓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돈은 공사인부들이 술 한 잔 하면서 이날 하루 쉬기도 한다.

▲ 주인이 술을 따르고 절을 한다.
▲ 마룻대를 올린 후 정리하고 있다.
상량문(上樑文)은 집을 짓게 된 경위나 사유 등을 기록한 문서로서, 한지에 한자를 많이 섞어 쓰는데, 흰 봉투나 대나무 통에 넣어 종도리에 홈을 파 따로 넣어 밀봉하고, 밀봉 후 ‘상량문재중’이라는 글씨를 써서 표시를 해 놓아둔다. 몇 백 년이 지나고 건물이 노후하여 중수 할 때 건축을 하게 된 역사를 알 수가 있다. 상량문이 명문이라면 나무판에 새겨서 대청 한쪽에 자랑스럽게 걸어 두기도 한다. 누구나 그 명문을 읽게 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 상량문(上樑文)을 봉함한 표시.
▲ 상량문(上樑文).
상량식을 다 마치고 나면 음복하고 떡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차츰 전통양식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전통적 의식을 갖춘 상량식을 구경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구세대라고 지칭 받는 나이지만, 관심이 없어서일까, 집안 제사상 차릴 때도 매번 책을 펴 놓고 볼 정도로 익숙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배우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고현성 북문루 상량문 전문이다.

고현성 북문루 상량문(古縣城 北門樓 上樑文)

고현성(古縣城)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9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818m, 높이 2m, 폭 5.5m로서 면적은 10,971㎡이다.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6호로 경상남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고현성은 문종원년(1451년)에서 단종원년(1453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성곽의 형태와 구조는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장대지 위에 평면의 선형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운옹성과 치·해자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전기 읍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근역(槿域)의 사천여년(四千余年) 역사(歷史)와 더불어 우리시가 오늘에 이르기 까지 장구(長久)한 세월 역사(歲月 歷史)의 변천(變遷)과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시대(時代)의 변화(變化)로 고을의 읍중(邑中)이었던 고현(古縣)은 근대사(近代史)에서 지방(地方)의 면소(面所)로 출장소(出張所)로 퇴락(頹落)하게 되었으나 광음여류(光陰如流)는 드디어 암흑(暗黑)의 시대(時代)는 가고 광명(光明)의 시대(時代)가 도래(到來) 민족(民族)의 염원(念願)인 해방(解放)의 환희(歡喜)를 맞이하였고 그리하여 통영군(統營郡)에 병합(倂合)되었던 군(郡)이 복군(復郡) 됨으로써 면(面)에서 읍(邑)으로 군청소재지(郡廳所在地)로 바뀌고 행정제도 개혁(行政制度 改革)에 의(依)하여 시(市)로 승격(昇格)함에 따라 급속(急速)한 발전(發展)으로 고을 중심도시(中心都市)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과정(過程)에서 고현성(古縣城) 역시(亦是) 온전(穩全)할 수가 없었다.

상고(詳考)해 보면 고현성(古縣城)은 조선왕조 문종 원년, 신미(朝鮮王朝 文宗 元年, 辛未)부터 단종 원년, 계유(端宗 元年, 癸酉)사이에 축조(築造) 되었고 둘레가 3038척 높이 13척의 석축성(石築城)이었다. 그 이래로 임진(壬辰)의 병화(兵禍)와 변전(變轉)하는 풍상(風霜)을 견디며 성곽(城郭)은 유지(維持)되어 왔으나, 1950년 6·25 사변(事變) 때 고현리(古縣里)를 비롯하여 문동리·상동리·장평리·양정리·수월리·연초면 임전지역(門東里·上東里·長坪里·良井里·水月里·延草面 荏田地域)의 전주민(全住民)을 미군(美軍)이 강제(强制)로 철거이주(撤去移住 )시키고 그곳에 유엔군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가 설치(設置)됨으로서, 현대식 중장비(現代式 重裝備)에 의(依)하여 향사(鄕史)에 빛나는 성곽(城郭)은 극심(極甚)하게 파괴(破壞)되었고 성지(城址)조차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었다.

1953년 휴전협정(休戰協定)으로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를 철수(撤收)함으로써 이주민(移住民)들이 속속복귀(續續復歸)하였고 토지구획정리(土地區劃整理)를 실시(實施) 농지기반조성 (農地基盤造成)과 아울러 도시계획(都市計劃)으로 시가지(市街地)를 정비(整備)하니 시(市)의 중심도시(中心都市)로 발전(發展)하였으나 많은 시민(市民)들은 고현성(古縣城)이 형지(形址)도 없이 살아지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그 일부(一部)나마 복원(復元)을 갈망(渴望)하는 시민(市民)의 여론(與論)이 날로 비등(沸騰)하는 실정(實情)이다.
문화유산(文化遺産)은 인류(人類)의 보편적 가치(普遍的 價値)로서 옛 선철(先哲)은 문화유산(文化遺産)이 없는 고을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沙漠)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 고을은 지리적(地理的)으로 해중(海中)의 도서(島嶼)로서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문화(文化)가 매우 낙후(落後)되어 후진(後進)을 면(免)치 못하였다. 그러나 양대조선소(兩大造船所)의 성업(盛業)으로 근대산업(近代産業)의 발달(發達)로 인구(人口)의 증가(增加)와 육지(陸地)와의 교통망(交通網)은 도서(島嶼)라는 편견(偏見)을 불식(拂拭)하게 되었고, 나아가 문화(文化)에 대한 시민(市民)의 정서(情緖)가 새롭게 일어나고 누문(樓門)을 복원(復元)하자는 공론(公論)의 일치(一致)로 김한겸 시장(金汗謙 市長)은 도비지원(道費支援)과 시비(市費)를 확보 길일양신(確保 吉日良辰)에 새 터에다 누각(樓閣)을 세우니 신명(神明)의 보우(保佑)련가 어느 듯 모든 공역(工役)이 끝나 윤환(輪奐)이 빛나며 뜻이 있는 이는 마침내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이 점차(漸次)로 많이 보존(保存)되어 있어야 유서(由緖) 깊은 고읍(古邑)으로서 명승지(名勝地)가 될 것이다.

이제 긴 대들보를 들어 감(敢)히 칭송(稱頌)하는 글을 올리고자 한다.
어기여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대명의리(大明義理) 붉은 해가 동방(東方)에 떠오르니 소소(昭昭)한 이 속에 천기(天機)가 있으니 그 뜨고 잠김에 일리(一理)가 같다.

어기여차 들보를 서(西)쪽으로 던지니
회진(灰塵) 옛 마을 하늘의 문성(文星)과 응(應)했도다. 때를 위(爲)해 문명(文明)의 상징(象 徵) 나타났으니 많은 현인(賢人) 일어 나 시민대중 계발(市民大衆 啓發)하리

어기여차 들보를 남(南)쪽으로 던지니
가라산(加羅山)에 상서(祥瑞)로운 운하(雲霞)가 끼었다 바라보니 뭇 봉우리가 그림같이 아 름답고 하늘빛 구름 빛이 이 속에 잠겨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北)쪽으로 던져보니
계룡산(鷄龍山)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여맥(餘脈)인 우리고을 진산(鎭山)이라 상운(詳雲) 이 창망(滄茫)한 빛을 가리었네.
칠요(七曜)가 분명(分明) 그 사이에 개재하고 뭇 별이 낱낱이 북극(北極)에 귀향(歸向)하리.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로 던져보니
넓고 큰 하늘에 삼광(三光)이 밝았구나. 찌꺼기 모두 씻고 서로가 융화(融和)하면 이 고장 의 시민(市民)들 마음도 저와 같이 높고 밝으리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져보니
저 아래 고현천(古縣川) 흐른 물 쉬지 않고 줄줄 근원(根源)이 있어 끝없이 이어가니 쉴 새 없이 순화(醇化)를 일으킨다.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上樑)한 뒤에 산수(山水)는 맑은 기운(氣運)을 도와주고 음침(陰沈)한 음기(陰氣) 사라지고 완고(頑固)한 사람 청렴(淸廉)해지게 하소서 삼가 의리(義理)와 이익 (利益)에는 취(取)하고 버리는 것을 반드시 밝게 살피며 부정(不正)과 정의(正義)는 옳고 그 름으로 밝히게 하소서

西紀 二千六年 五月 十八日

晩仁 朴丙熙 撰
素庭 尹鍾潾 書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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