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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그래도 난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나뿐인 자식,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아빠, 저 군대 갈 겁니다."

지난 2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운동장에서 만난 아들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파묻혀 정확히 듣지 못해서 다시 물으니 아들 녀석이 올 3월에 군에 입대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뭐라꼬, 대학은 안 가고?"

수시 합격해 놓았으니 휴학계 내고 먼저 군대부터 갔다 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허락을 구하거나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써 군 입대에 관한 것을 다 알아보고 결정한 후 일방적으로 하는 통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입대를 하루 남긴 날, 조카의 군 입대를 축하하고 위로하는 자리를 큰아빠가 마련하였다. 이내 큰아빠의 조언이 이어졌다.

"군에 가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장정들이 있나 손들어 보라고 하는데, 석이는 절대 손을 들면 안 돼. 처음이라 분위기도 낯설고, 조금은 겁도 나는데, 다른 사람 손든다고 해서 같이 들었다가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인내심을 갖고 참아내야 해. 석이는 스스로 군에 지원을 했고, 어차피 남자는 군 복무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약한 마음 접고 강한 마음으로 군 생활 열심히 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한단다."

"예"하는 짧은 대답이 이어졌지만 아들 녀석은 듣는 둥 마는 둥 별로 관심 없이 음식만 먹는다.

큰 아빠의 전송을 받으며 군 복무를 위해 보충대로 향하는 아들의 마음은 어떨까 궁금하다. 지난 1980년 내 자신의 군 입대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마산역에 대기한 군용열차를 타기 위해 까까머리 장정들이 줄을 지어 시내를 걷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입영전야'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모두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만 보며 묵묵히 걸었다. 그때, 그 노래가 왜 그리 애처로이 들렸는지? 그 당시에는 거제에서 마산까지 오는 차편도 넉넉지 않아 부모님으로부터 배웅도 받지 못하고, 마산 인근에 있던 누나와 사촌 자형이 떠나가는 열차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서울을 지나 집결부대가 가까워지자 묘한 기분이 든다. 아들 녀석의 기분은 어떨까? 부대 인근 지역에는 많은 차량이 밀렸고, 몇 번의 신호를 받아야만 신호등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마도 모두 군 입대 장정들인 모양이다.

부대 입구는 사람과 차량으로 북새통이다. 군중을 뚫고 부대 연병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군 제대 후 처음으로 군 부대 안으로 들어와 보니 감회가 새롭다. 연병장, 막사, 화장실, 키가 큰 가로수, 국기게양대 그리고 장병들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시간이 넉넉한지라 부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아들 녀석은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할까? 동행한 동생이 분위기를 깼다. 시간 있을 때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시끌벅적한 식당은 시장터의 모습이다. 모자를 쿡 눌러 쓰고 어딘가에 큰 소리로 전화하고 있는 아들 또래는 그저 즐겁고 걱정이 없는 듯하다. 또 다른 식탁에는 아빠, 엄마 그리고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아들 또래는 기가 없고 풀이 죽은 모습이다. 넷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아들 녀석은 맛있게 먹는다. 평소 아빠로부터 군 생활 얘기를 들을 때 배가 고팠던 것이 제일 힘들었다는 얘기를 들어서였는지, 그래서일까, 씹지도 않고 먹는 것 같다. 난 두 숟갈의 밥도 채 넘길 수가 없었다. 고생할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오고, 눈가가 축축해진다. 남은 밥을 아들의 밥그릇에 채워주니 그것도 순식간에 해치운다.

집결시간 한 시간 전, 다시 연병장으로 들어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점심식사할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아 눈물샘이 젖었고, 자꾸만 옛 생각이 난다. 나의 군 생활 시절, 눈 오는 날, 힘들게 받았던 훈련 모습이 오버랩된다. 아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고 눈가가 촉촉해져 온다. 많이도 참았다. 그런데 이제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 보충대 연병장에 선 아들
아들한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평소, 아들한테 너무나 강한 아빠로 각인되었던 터라 차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고 울지 않으리라 다짐해 보지만 눈물샘이 젖어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기 어려웠다. 아들에게 아빠가 흘리는 눈물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을 살며시 불렀다. 난 먼저 밖에 나가 있겠다고 말하면서, 배웅 잘하고 격려해 주라는 당부를 하고서는 돌아섰다. 멀리 떨어진 아들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살짝 돌아보니 한참이나 멀어져 있다. 끝내 아들 녀석과 인사도, 손도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채, 돌아서고야 말았다.

차 안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도 떨리고 목소리도 울먹이는 상태다.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잘 참아지지 않는다.

"훈련생활 잘 참아내고, 건강하게 군 생활 잘해."

"예"라는 응답이 전부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쉬움이 또 다시 몰아친다.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였고, 헤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꼭 껴안아 주지 못한 미안함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또 다시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고, 더더욱 사랑한다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건강하게 군 생활 잘해."

이 한마디 말로써 아들과의 작별인사는 끝이었다. 아들은 알고 있었으리라. 아빠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입영 시간을 넘긴 시간, 동생으로부터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들으며, 아들의 폰을 건네받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사랑한다. 내 아들 정한석. 아빠는 군 복무시절,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힘든 훈련을 받았고, 약 3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건강하게 제대해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단다. 석이도 군에서 많은 것을 겪고 느끼며 경험하겠지. 아마도 제대하면 지금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몸과 마음이 건장하게 성장한 내 아들을 보고 싶구나. 그때 현역 제대한 남자끼리 군대 얘기 함 해보자꾸나. 건강하게 군 생활 열심히 하기 바란다. 사랑한다 내 아들 정한석."

입대 후 백일이면 위로 휴가를 나오겠지. 그땐 조금은 더 성숙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돌아올 아들 녀석을 크게 한번 포옹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