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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도서] 장륙존상에 오른 소녀, 고공농성의 시초였을까, 민음사『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를 읽고/발원 서평

 

[신간도서] 장륙존상에 오른 소녀, 고공농성의 시초였을까,

민음사『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를 읽고/발원 서평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민음사.

 

[신간도서] 장륙존상에 오른 소녀, 고공농성의 시초였을까,

민음사『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를 읽고/발원 서평

 

장륙존상에 오른 소녀, 고공농성의 시초였을까

소설 <발원>을 읽고, 화쟁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이다

 

어째 이리도 닮았을까. 1350여 년 전과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달라진 게 있다면, 굶주림에 시달렸던 ‘민초’들의 허기는, 배부르고 넉넉해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만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억울함을 호소해도 관심 기울여 주는 곳도 별로 없다. 나아가 힘겨운 삶을 사는 거기서 거기인, 민초나 국민들도 편이 갈리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분쟁을 풀어야 할 주체들은 자신들의 입장만 되풀이 할 뿐, 갈등이 해결 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 있다. 높이 수십 미터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던 현세의 일이, 먼 과거 황룡사 장륙존상에 올라가 이레 동안 버텼던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시초였다는 것을. 김선우 작가의 장편소설 ‘발원’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고야 말았다. 원효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갓신에 이마를 대면서까지 치욕과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저 아이를 제 발로 내려오도록 설득하겠다”고 사정한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아이는 ‘툭’하며 떨어진다. 바람이 한 줄 불어와 낙엽 한 장을 떨어뜨리듯이.

 

“황룡사 중노릇 이만큼 하셨으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가림막이란 것이 딱히 가리려는 데에만 목적이 있겠습니까. 가림막은 배후를 만들어 내기에 좋은 장치이지요. 눈을 가리면 사람들에겐 공포가 생깁니다. 공포는 백성을 유순하게 만들지요.”<발원 1권, 250쪽>

 

이 대목에선 놀라움은 극으로 치닫는다. 소녀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높은 곳 불상 위에 불안전하게 미동 없이 앉아 있는데도, 추상같은 명령은 떨어진다. “가림막을 올려라!” 아이의 생명과 안전에는 애초부터 대책을 세워 놓은 것도 아니다. 일꾼들이 동요하자 채찍을 휘두르고 마지못해 가림막이 세워졌다.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을 넘었지만,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꼬꾸라지고 말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한 농민은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림막과 차벽, 묘한 울림을 낳는다.

 

자고 일어나면 갈등을 전하는 소식이 TV 화면을 꽉 채운다. 신문을 펼쳐도 마찬가지다. 층간소음으로 이웃사촌을 죽이고, 보험금을 타 내기 위해 가족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게 일어난다. 국민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집회도 ‘불법시위’와 ‘질서유지’라는 논쟁이 계속되는 지금이다.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사정을 본다면 어떨까. 최근 발생한 IS 무장단체는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내세우지만, 결코 정당화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불자로서 개인적으로 원효가 걸어왔던 삶과 그의 사상에 짧은 이해를 한다면 과분한 자찬일까. 때맞춰 나온 김선우 작가의 장편소설 <발원>이 눈길을 끌었다. 소설은 역사에 기록된 내용과 어떤 차이가 날까 무척 궁금했다. ‘요석 그리고 원효’라는 부제 속에 소설의 내용에 대해 대충 감을 잡은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출가한 스님과 왕실 공주와의 로맨스. 제목만 놓고 본다면 충분한 흥미를 끌고도 남을 터. 그럼에도 첫 장을 넘기면서 로맨스보다는 원효의 삶, 그것도 갈등과 분열을 넘는 ‘화쟁’의 정신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김선우 작가에게 고마움의 인사라도 전하고 싶다.

 

문제는 소설 속에 나타나는 각 계층 간의 갈등, 민초들 사이 끼리에서도 벌어지는 갈등,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그 중재자는 누가 나서야 하는가. 우산장수와 짚신장수의 두 아들을 위해 누구를 기도해야 옳은 일일까. 어느 쪽 편을 들어야 분쟁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있다면 인간사회에 ‘갈등’이라는 분쟁은 없어지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원효는 열여섯 나이에 서라벌로 떠났다. 새벽이라는 아명을 버리고 원효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불법을 터득하고 민초들을 껴안았다. 해골 물을 마시고 진정한 깨달음도 느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치료하는 자비와 사랑도 실천했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한 어린 소녀의 목숨을 목전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질책하면서. 큰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자책 때문이었을까, 원효는 요석을 떠나가면서 소성이라는 이름을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주었다. 그리고 민초와 함께 아픔을 함께 나눴다.

 

“툭. 바람이 한 줄 불어와 낙엽 한 장을 떨구었다. 원효가 털썩 주저앉았다. 소녀는 장륙존상에 올라가 사흘 동안 자신의 사정을 승려들에게 고했다 했다. 그 뒤론 목이 쉬어 말하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태로 불상의 어깨에 기대앉아 시름시름 탈진해 갔다. 여린 생명 하나가 죽어도 저렇게 죽어 가도록 부처님의 뜻을 따른다는 승려들은 무엇을 했으며, 나는 이 황룡사에 들어와서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괜한 공명심 아니었던가. 백성들과 눈을 마주치며 지껄이는 설법 나부랭이에 스스로 흥이 올라 정작 구해야 할 소녀의 목숨은 뒷전으로 미룬 것은 아닌가. 비통한 울음이 재갈 물린 원효의 목울대를 찢으며 흘렀다.”<발원 1권, 253쪽>

 

소녀는 높은 곳에 올라 자신의 사정을 나흘씩이나 스님들에게 알렸다. 목이 쉬어 말하지도 못하고, 탈진해 시름시름 생명이 꺼져감에도, 관심을 가진 스님은 없었다. 지혜로 가득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스님들은 애써 눈을 감고 말았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친다면서 설법 나부랭이에 스스로 흥이 올라 공명심만 키웠던 것은 아닌지. 그나마 원효는 재갈물린 비통한 울음으로 자신의 목울대를 찢는다.

 

사회 곳곳에 갈등이 만연돼 있고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의 인간사회는 아수라장이라고 해도 과히 심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삶이 고통이다. 갈등은 인간관계를 불신하고 가슴에 원한을 품게 만든다. 한국 불교의 가장 특징적이자, 불교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화쟁사상. 원효가 제시한 이 불교사상은 갈등을 풀어가게 할 핵심중의 핵심이다. 갈등과 분쟁이 넘쳐나는 사회, 그 어느 때보다도 스님들의 화쟁정신이 빛을 발할 때다.

 

소설 <발원>은 갈등과 분열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어느 가엾고 여린 소녀의 죽음에 질타를 가하고 있다. 승려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를.

 

 

[신간도서] 장륙존상에 오른 소녀, 고공농성의 시초였을까,

민음사『 김선우 장편소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를 읽고/발원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