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에 늦은 가을을 만나러 가다
  
▲ 단풍 가지 않으려 가을을 붙잡는 듯한 붉디 붉은 단풍. 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세상의 광명을 비추기를 희망해 본다.
붉은 단풍

11월 18일 아침. 벼를 걷어낸 빈 논은 서리가 내려 눈이 온 것처럼 새하얗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진주종합경기장에 도착한 시간은 채 여덟시도 되지 않은 시간. 업무 차 가는 출장이지만, 여행이라 생각하니 설렘이 드는 것은 당연한가 보다. 텅 빈 논만큼이나, 드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고, 일행을 실은 버스는 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늦가을을 맞으러 예천으로 향했다. 참으로 세상 좋아졌다는 게 실감난다. 지난해 5월 개통한 대전~당진 간 30번 고속국도는 일행을 더욱 빨리 수덕사에 내려놓았다. 

  
▲ 일주문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아름다리 고목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일주문

평일이지만 수덕사 주차장은 대형버스와 승용차로 반 이상 차 있다. 때를 넘긴 점심, 허기진 배는 밥 한 그릇으로 채워졌다. 약간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낙엽 떨어져 나뒹구는 오솔길을 걸어본다. 늦가을 진한 단풍은 사람 마음까지 붉게 물들인다. 단풍잎 등에 가을햇살을 인 것일까. 붉은 단풍은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강렬한 햇빛이 잎사귀 사이로 비춘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묵직한 네 개의 배흘림기둥에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아래 한글로 새겨진 현액이다. 사찰은 보통 일주문이라는 현액을 달지만, 이 절은 이 문이 일주문을 대행하는 것일까. 비교적 넓은 진입로에 가람의 시작을 알리는 문은 그렇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불법(佛法)에 빠져, 나름 공부를 하고 있다. 총림이란, 석가모니 부처를 비롯한 부처나 보살을 모신 대웅전만 있는 절이 아니라, 강원, 선원, 그리고 율원을 갖춘 사찰을 말한다. 강원이란 경전교육기관이요, 선원은 참선수행 전문도량이며, 율원은 계율전문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섯 군데 총림사찰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와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그리고 오늘 찾는 예산 수덕사가 모두 총림사찰이다. 

단풍잎이 내려앉은 절터는 조용하다. 늦가을 정취에 푹 빠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가며 얘기를 나누지만, 고요함과 적막감에 묻힌 듯하다. 부처님 오신 날도 아닌데 연등이 빼곡히 걸려있다. 궁금해서 스님에게 물었더니 지난 달 행사가 있었단다. 연등 밑으로 나풀거리는 깃에 적힌 이름들, 무슨 소망을 빌었을까. 

  
▲ 수덕사 십 수년 전 찾았던 수덕사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수덕사

수덕사(修德寺),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아래 자리한 절로서, 백제 15대 침류왕 2년인 358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수덕사 홈페이지). 문헌에는 백제시대 사찰로는 12개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수덕사만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고 한다. 십수 년 전, 처음 이곳을 온 이후 두 번째 오는 셈이다. 높은 계단을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인 절터 마당이 넓게 펼쳐진다. 옛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대웅전(국보 제49호)과 삼층석탑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절터에 오면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가슴이 넓어지는지. 

  
▲ 중생 수덕사 마당에 쌓여 있는 낙엽. 어리석은 중생이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해 절에 와 있는 느낌이다.
중생

조인정사 앞마당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중생 껍데기가 한데 무리지어 있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나무는 때가 되면 잎을 떨어뜨리고, 새 잎으로 태어나,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반복한다. 사람도 흐트러진 마음에서,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새로움을 창조하려지만, 어리석음을 반복하고야 만다. 떨어지는 잎사귀는 낙엽이요, 떨어지는 마음은 낙심인가? 오늘 이 절터에서 낙심을 모아 불태워버리고, 새로운 마음의 잎을 태어나게 빌어본다. 절터에 떨어져 썩어 없어질 하찮은 나무 잎사귀에서 받는 교훈이 있다면 절에 온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겠는가. 

경내는 조용함속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닫힌 문, 대웅전에서는 목탁소리가 창살을 뚫고 중생에게로 이어진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쌨다가 약해지며, 약해졌다 쌔어지는 굵고 깔끔한 목탁소리. 이 소리만큼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소리가 또 있을까?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려 했지만, 안에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밖에서 한참을 목탁소리와 함께해야만 했다.

 

  
▲ 닫힌 문 닫힌 문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속세의 시끄러운 소리를 정화해 주는 것만 같다.
대웅전

  
▲ 기와불사 어리석은 중생이 세상광명이라고 쓴 기와불사. 외국 사람들의 기와불사도 많이 보인다. 국적이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 같은 모양이다.
기와불사

대웅전 옆 측면 계단에서 바라보는 앞마당, 멀리 보이는 확 트인 공간은, 가람배치가 환상적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느꼈던 시원함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만 같다. 기와에 가족의 건강이나 소망을 비는 글을 적어 보시하는 기와불사. 1만 원 보시로 기와 한 장에 소망을 적을 수 있었다. '세상광명, 2010. 11. 18.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가족 구성원 그림과 소망을 적은, 재미있게 표현한 기와불사는 일본어로 표현된 것을 보니 일본사람인 모양이다. 한국어, 영어, 일어 그리고 한자 등 다양한 문자의 기와불사를 볼 수 있다.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 같은 모양이다. 

  
▲ 묵언 말 많은 세상이다. 침묵은 금이라 했고, 남의 말을 경청하라 했던가? 이 절터에서 만큼이나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본다.
묵언

대나무로 만든 문에 달린 작은 검은 간판. 한자로 묵언이라 적혀있다. 옛말에 침묵은 금이라 했고, 남의 말을 많이 들으라고 했던가. 중생의 어리석음을 스님이 죽비로 내리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말 많은 세상에서 뒤질세라 말을 안 하기란 어렵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인 법. 말 많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이곳에서 또 깨치고 가는 행복이다. 

  
▲ 샘물 배 모양을 닮은 돌로 만든 식수통. 물컵 주변에 '손을 씻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기본적인 예절이 없는 사람들이 절을 많이 찾아 오는 탓일까.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샘물

마당에 있는 약수터에 투박한 플라스틱 바가지가 네 개 걸려있다. 큰 돌을 깎아 만든 물통에는 맑고 깨끗한 자연수가 담겨 있다. 거울을 보는 느낌이다. 절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 물을 마실게다. 그런데 바가지가 걸려있는 곳에 '손을 씻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당연히 해야 하지 말아야 할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알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도 어리석음을 깨치는 절터에서. 이런 안내문을 걸어야만 하는 사찰 측 입장이 아쉽고, 예절 없이 절을 찾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 정혜사 수덕사 마당에서 바라본 정혜사. 한 시간 걸려 가는 곳이라고 한다. 다음에 수덕사를 찾는다면 꼭 가도록 해 봐야겠다.
수덕사

대웅전 뒤 멀리 산 정상아래 작은 암자가 보인다. 쉬엄쉬엄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그곳에 정혜사가 있다. 발걸음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면서 수행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발길을 돌려 절을 빠져 나왔다. 내려오는 길 중간쯤, 붉게 물든 단풍의 유혹에 빠져, 오른쪽으로 나 있는 숲길을 따라가 보았다. 숲속에 묻혀 있는 또 다른 산내암자인 원통보전이다. 화려한 단청, 길게 뺀 처마, 취두로 치장한 용마루 그리고 편액 양 옆으로 머리를 쭉 뺀 용 두 마리의 머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원통보전은 석가모니 입적 이후 미륵이 나타 날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로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불상은 관세음보살 단독으로 모셔 진다. 협시보살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기는 하나, 이 법당에는 불상 뒤 관음탱화에 나타나 있다.  

관세음보살 머리 위 벽면에 3층 규모 닫집이 붉은색으로 정교하게 지어져 있다. 궁전 안 옥좌 위나 법당 불좌 위에 만든 집이 닫집이다. 많은 절을 다녀 봐도 닫집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다. 닫집 1층은 원통궁, 2층은 자비궁, 3층은 보광궁이라는 작은 편액이 걸려있다. 집안에 또 다른 집이라 일컫는 닫집을 법당 안에 설치하는 것은 불국정토의 궁전 모습을 법당 안에 재현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는, 부처님 머리 위에 설치한 장엄구로서, 보개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고 한다. 

  
▲ 기도 수덕사 산내암자인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두 여인. 뒤로는 붉은 색의 닫집이 화려하다.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앞에 두 여인이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려 기도한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불심일까. 삼배하고 돌아서는 길에 보니 환희대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 길 끝에 수덕사 산내암자 원통보전이 나온다. 나오는 길에 수덕사선미술관에 들렀다.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도 넉넉해서 좋았고, 인생의 고통과 어리석음이 담겨 있는 스님의 작품도 좋았다. 수덕사 입구에서 한 마당을 즐겼다. 몸 어디어디에 좋다는 약초도 많다. 과일과 곡식도 널려있다. 만원어치 약초를 샀다. 행복 가득한 수덕사 여행길이었다.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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