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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법문

[나의 부처님] 나를 알아가는 것(1), 청아스님(수원 공소사)/오늘의 법문에서

 

[나의 부처님] 나를 알아가는 것(1), 청아스님(수원 공소사)/오늘의 법문에서

 

양산 통도사 삼성반월교.

 

[나의 부처님] 나를 알아가는 것(1), 청아스님(수원 공소사)/오늘의 법문에서

 

나를 알아가는 것(1), 청아스님(수원 공소사)

 

불교에서는 나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모두 다섯 가지 합으로 봅니다.

 

첫째, 몸뚱이 즉 육신(색, ).

둘째, 이 육신에 달려있는 눈, 귀, 코, 혀, 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것들의 작용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면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작용(수, 受).

셋째, 이 받아들이는 작용에 의한 생각(상, 想). 즉 아! 지금 밝구나, 어둡구나, 조용하구나, 시끄럽구나, 공기가 신선하구나, 악취가 나는구나, 맛있구나, 맵구나, 따뜻하구나, 춥구나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넷째, 이 생각에 따라서 하는 정신적 육체적 행동(행, ). 예를 들면, 추우니까 몸을 좀 움직여야겠다 혹은 난로를 좀 피워야겠다 하면서 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이러한 행동에 의한 주변상황의 포괄적인 인식(식, ). 즉 추워서 움직였더니, 옆의 사람이 불편하게 반응하므로 춥더라도 참아보자 하고 인식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오온(五蘊)이라고 하며, '나'는 이것들의 집합체로 봅니다.

 

서양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즉 육체와 정신으로, 정신은 감성과 이성으로 보며, 육체는 기계론적으로 즉 육체의 각 부분의 합으로 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을 이 다섯 가지의 집합체로 이해를 하는데,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하나씩 분석해 보면 그 중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항상함이 없다는 의미의 무상(無常) 또는 고정된 나가 없다는 의미의 무아(無我)로 '참나'를 표현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나 마음을 이 세상 모든 것과 구별되는 독립된 개체 내지는 단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사람이 죽어서 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여러 생명이 죽어서 한 생명으로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단일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다수라고 할 수도 없어 숫자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으며, 또한 나라고 세울 수 있는 것이 없어 무아가 곧 '참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에 대한 관점은 기계처럼 부분의 합이 아니라,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부분이므로 부분과 전체가 둘 아니게 보는 것입니다.

동물의 체세포로서 생명을 복제하거나 인삼의 체세포로서 인삼을 배양하는 것이 이러한 불교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몸속의 어떤 세포 하나가 전체 몸의 정보를 다 포함하고 있듯이, 우리 자신의 생명 속에 또한 우주의 모든 생명이 들어 있으므로 일체 모든 것이 나아님이 없어 무아인 것이 '나'의 참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낼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의 거울을 하나씩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거지나 생각과 감정들을 세밀히 이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오.

 

그러면 먼저 타인이나 부모, 혹은 회사나 사회를 원망하는 마음이 점차로 없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너그러움의 온기가 상존하여 잔설과 같은 의문들을 녹여내게 됩니다.

심지어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과 불행도 나를 알아 가고 나를 다스려 가고 나를 변화시켜 가는 계기로 스스로 화(化))하니 어찌 이 '참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길을 권하지 않겠는가?

 

나를 알아 가는 것(2), 청아스님(수원 공소사)

 

 

[나의 부처님] 나를 알아가는 것(1), 청아스님(수원 공소사)/오늘의 법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