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여행] 함양 안의면 광풍루 주변 유적지 답사,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와 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
/함양여행코스/함양 가볼만한 곳/광풍루 단청/금호강변
함양군 안의면에 소재한 광풍루.
함양 안의면에 소재한 광풍루.
이 누각은 유난히 더웠던 지난 8월 단청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광풍루 바로 앞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광풍루 주변으로,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 『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도 서 있습니다.
광풍루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역사의 기록을 살폈습니다.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이 누각은 1412년(태종 12)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 우(생몰 연대 미상)가 건립하였는데,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였다. 그 후, 1425년(세종 7)에 김홍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으며, 1494년(성종 25)에 안의현감이던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로 바꾸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불타는 등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였으나, 처마 돌출이 작기 때문에 호방하고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 읍내의 학사루와 유사한 건축 양식이다. 광풍루는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누각 위에 걸린 옛 시인의 글귀만이 옛 금호강변의 아름다운 '빛과 바람(광풍)'의 느낌을 전해 줄 뿐이다.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商務左右社接長 河璟詢褒善不忘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5호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안의를 중심으로 한 상무좌우사의 접장 하경순(1875~1946)의 공적을 기려 안의 상인들이 1911년 세운 비석. 상무사는 1899년(광무 3) 설립된 상업 관장 기관이다. 이보다 앞서 1883년(고종 20)에 설립된 해상공국이 2년 뒤 상리국으로 개칭되면서 등짐장수인 부상의 단체를 좌단, 봇짐장수인 보상의 단체를 우단으로 불렀다. 상무사는 좌단을 좌사, 우단을 우사로 고쳐 불렀다. 지역경제사 연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16
관리자 : 함양군
의병대장 문대서 기공비는 안의면에서 거병한 의재 문태서(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1963)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70년 3월에 건립되었다.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던 중 1905년에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자 금강산을 나와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 선생의 피체 이후 뒤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전라도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전국적 의병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진공이 중지되자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몰린 장군은 유격전을 벌이다 1912년 8월 본가 방문 중 왜국밀정의 계략에 빠져 피체, 1913년 서울에서 34세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광풍루 주변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