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산소가 있는 아양공동묘지에서 바라 본 대우조선(2020. 10. 1.)

한가위 조상님 성묘를 위해 고향 거제도를 찾았다.

함양에서 고향집까지는 150km, 1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다.

지난 8월 산소 벌초작업을 마친 후 고향으로 다시 가는 길이다.

 

아버지 산소를 비롯한 조상님 산소는 내가 태어난 마을 뒷산 마을 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다.

나의 출생지는 경남 거제시 아양동 496번지(법정리)로 지금은 대우조선해양 주식회사(영문표기, Daewoo Shipbuilding & Marine Engineering Co., Ltd. (DSME)가 자리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주식회사(이하 대우조선)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지금도 역사를 기록 중에 있다.

또한, 나 개인과 나의 가족에게도 수많은 발자취를 남긴,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업이기도 하다.

 

대우조선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3년 10월 11일 공식적으로 출발했다.

물론, 그 전부터 사전 준비는 철저히 준비는 돼 왔겠지만 말이다.

당시 대우조선의 출발은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라 부르며 기공식을 거행했고, 중공업 육성을 통한 국가발전을 꾀했던 박정희는 한반도 최남단인 거제도까지 몸소 참석하여 독려(?) 하였다.

나는 그때 발언대 뒤에 서서 연설하는 박정희를 똑 바로 볼 수 있었고,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발언대 위에 얼굴만 올려놓은 모습으로 지금도 각인돼 있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대우조선의 역사는 앞으로 3년 후가 되는 2023년이면 정확히 반세기를 맞이한다.

50년 짧은 역사를 가진 대우조선이지만, 크고 작았던 발전의 역사는 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여기에 간략히 써 본다.

 

☞ 대우조선해양(주)의 지나온 기록

 . 1973년 10월 11일 :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 기공식(박정희 대통령 참석)

 . 1978년 10월 : 1차 오일쇼크로 인해 대우그룹 산하 대우조선공업(주) 사명 변경

 . 1992년 10월 : 대한민국 최초 전투잠수함 이천함 건조

 . 1994년 10월 : 대우중공업(주)에 합병

 . 2000년 10월 : 대우그룹 해체로 분리하여 독립

 . 2001년 : 워크아웃 졸업과 LNG선 수주 세계 1위 기록

 . 2002년 4월 : 대우조선해양(주)로 회사 명칭 변경

 . 2016년 8월 : 본사를 서울에서 거제시로 옮김(경남 거제시 아주대로 3370(아주동)

 . 2019년 3월 : 현대중공업(주)에 인수합병 결정

 

이밖에도 '대우조선' 하면 크고 작았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 기록이 있다.

그 중에서 대우조선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저자인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아닐까 싶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업가 김우중이란 인물은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으며, 그의 공과와 명암은 분명 존재하는 사실로, 나는 결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언젠가는 그에 대한 나의 생각과 대우조선의 크고 작았던 사건과 사고에 대한 기록도 정리할 생각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8월 25일, 정든 고향집을 떠나야만 했다.

국가발전을 핑계로 댄 정부로부터의 강제이주였던 것이다.

쓰러져 가던 초가집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7형제가 좁은 집에서 살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우리 집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겪던 시절이라, 그리 불행한 일이라 생각하지도 못했고,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당시 부모님이 경작했던 3천여 평의 소유 농지는 국가발전의 미명 아래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소위 '공특법'이라고 하는, '공공용지의 취득 및 손실보상에 관한 특례법'에 의거, 공공사업에 필요한 토지 등에 대해서는 이 법률에 따라 적법하게 보상을 해 주고 있다.

즉, 공공용지에 편입되는 토지 등에 대한 국가기관이 인정하는 감정기관에서 감정 평가 후 적정한 보상을 한다는 것.

이 법에 따라 감정 평가는 정부에서 매년 정하는 공시지가가 최소한의 기준으로 적용되며, 현실 거래액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는 이 법률이 제정되지 않아, '토지보상법'[지금은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전문개정, 2011. 8. 4.)]에 의거 보상액을 책정한 것으로, 당시 보상액과 지금 산정하는 보상액과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일 터다.

 

중학교 3학년 신분이었던 그 때, 부적정한 보상금 지급에 관한 집회나 데모는 생각지도 못했다.

당치도 않은 보상금을 수령하고 마을을 떠난 주민들의 집은 불도저가 밀어붙여 허허벌판이 돼 버렸고, 집은 육지 속의 섬으로 남아야만 했다.

일부 주민은 외딴 섬 속에서 살면서 버텼지만, 결국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야만 한 암울했던 그 시절 뼈아픈 기억은,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또한 언젠가 기록으로 남겨야 할 나의 임무가 아닐까 싶다.

 

대우조선, 기억나는 조각들만 해도 서랍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한 때 조선업계에서 세계 1,2위를 달리던 대우조선이었고, 지금도 세계에서 수위를 달리는 기업이지만, 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대우조선은 좀처럼 옛 명성을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거제시는 세계적인 두 조선소인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이 있으며, 지역경기는 이 두 조선소에 의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거제 지역경기는 말이 아니다.

부동산 거래는 전국이 그렇다고 하지만, 거제는 거의 불 꺼진 항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한가위를 맞아 조상님 산소에서 내려다보는 대우조선의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은 발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둠의 불편한 진실도 존재하고 있다.

대우조선의 빛과 명암 속에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의 조각들이 파편으로 떨어져 내 머리를 때리고 귓전을 울린다.

푸른 바다와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부드러운 조약돌이 깔린 바닷가에서, 뜨거웠던 여름에 알몸으로 멱을 감던 시절이 떠오른다.

 

환갑을 넘어 노년으로 가는 지금, 고향 거제도를 찾는 마음이 그리 기쁘지마는 않는 것은 왜일까.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보통 사람들의 기대도 크게 생기지 않는다.

애틋하게 느껴지는 그런 고향이 아니라, 그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평범한 이미지의 고향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듯할 뿐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던 산골...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노랫말처럼 고향 그 속에서 살던 그 때가 그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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