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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법문

[나의 부처님] 첫 마음 냈을 때가 정각 이룬 때(2), 인환스님/오늘의 법문에서

 

[나의 부처님] 첫 마음 냈을 때가 정각 이룬 때(2), 인환스님/오늘의 법문에서

 

합천 해인사 일주문.

 

[나의 부처님] 첫 마음 냈을 때가 정각 이룬 때(2), 인환스님/오늘의 법문에서

 

첫 마음 냈을 때가 정각 이룬 때(2), 인환스님

 

<법화경>에 '보유주의 비유'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무명속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의리 좋은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이를 불쌍히 여긴 친구가 그 친구의 걸망에 보물을 담아 둡니다.

그 친구 모르게 말이죠.

그런데 이 가난한 친구는 보물이 든 걸망을 메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초라한 걸망에 보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계속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수년이 지난 후 가난한 친구가 번듯한 집을 짓고 부유하게 살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보물이 있어도 있는 줄 모른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를 뿐입니다.

견성한다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 뿐입니다.

불성을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년만년 묵은 동굴의 어둠을 밝힐 때 천년만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동굴 안에서 횃불을 켠 순간 밝아집니다.

어둠은 일초도 안돼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서 발심에서부터 수행, 생사해탈을 몸소 보여준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디 딴 나라 사람도 아니고 수백 년 전 사람도 아니고 책속에 자주 나오는 사람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다간 사람입니다.

 

번듯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시험 준비를 하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만 합격하면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 기대로 공부에 전념하던 청년은 어느 날 종로 거리에서 당파싸움에 휘말려 효수를 당한 한 벼슬아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깨닫지요.

세상에 영원한 것, 진실인 것 없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합니다.

바로 무용스님 일화입니다.

 

 

무용스님이 열반하시던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에서 '점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용스님이 세수 90이 넘어 어느 날 대중들을 모두 모아놓고는,

"내가 오늘 가야겠다. 뭐 못마땅한 것 있느냐?" 하고는 입적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못마땅하다고 묻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잠잠한 가운데서 한 어린 시봉승이 말합니다.

"스님 오늘은 안 되겠습니다. 곧 있으면 설 다가 오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라고 말이죠.

 

무용스님은 이 시봉승 말을 듣고 기다렸다 며칠 후 다시 대중들을 불러 모아 처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잠잠함을 깨고 그 시봉승이 한마디 합니다.

"스님, 이번에도 안 됩니다. 신도들이 식구들하고 명절 보내고 이제 스님 뵈러 절에 올 텐데 참으신 김에 조금만 더 참아주시죠."

무용스님은 "그러마"하고는 또 한 번 기다립니다.

 

그리고서는 또 며칠 후 대중들을 불러 전과 같이 물었죠.

이번에도 또 그 시봉승이 일어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고맙습니다. 이제 가셔도 되겠습니다"

 

그러자 무용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정진을 하는데 있어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하고(지무생사, 知無生死),

생사가 없는 줄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하고(증무생사, 證無生死),

생사 없는 도리를 마음대로 쓸줄 알아야 한다(용무생사, 用無生死),

거기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용스님은 몸소 용무생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저 세속적 명예만을 위해 공부하던 한 청년이 무상함을 깨닫고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발심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그 마음 변치 않고 정진한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부처님] 첫 마음 냈을 때가 정각 이룬 때(2), 인환스님/오늘의 법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