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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고향함양/함양의사찰과문화

[함양여행] 함양의 문화재에서 배우는 역사공부, 안의면(옛, 안음현) 광풍루/함양여행코스, 함양 가볼만한 곳에서 볼 수 있는 함양의 문화재/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와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

 

[함양여행] 함양의 문화재에서 배우는 역사공부, 안의면(, 안음현) 광풍루

/함양여행코스, 함양 가볼만한 곳에서 볼 수 있는 함양의 문화재/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와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

 

함양군 안의면(옛, 안음현)에 있는 광풍루.

 

인구 4만여 명이 사는 작은 시골인 함양군.

함양군은 110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함양읍을 제외한 면 중에서는 안의면이 제일 큰 면에 속합니다.

현재 인구 4천여 명이 살고 있는 안의면의 옛 이름은 안음현(安陰縣)’.

안음현은 조선시대 경상도에 속한 현으로,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과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의 옛 고을을 관할로 두었다.

 

안의면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광풍루가 있다.

누각 2층에 올라서면 정면으로는 금호강이 눈에 들어온다.

아쉬운 점은 옛 강이 아니라는 점이다.

옛 시절의 정취에 취한다면 시 한 수가 바로 나올 법도 하련만, 인간도 자연도 속세에 찌들었는지, 감흥이 떠오르지 않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15세기 지어진 광풍루의 역사가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함양은 흔히 선비의 고장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큰 현에는 현령(縣令)’, 작은 현에는 감무(監務)’를 두다가 뒤에 현감(縣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종 13(1431) 외관직 품계를 정리 할 때 현령은 종 5, 현감은 종 6품으로 정했다.

앞서 언급한 조선시대 안의현은 종 6품인 현감이 고을을 다스렸으며, 현령을 두었던 현으로는 전국에는 26명의 정원이 있었다.

이 중 경상도에는 영덕(盈德), 경산(慶山), 의성(義城), 고성(固城), 남해(南海) 등이 있었다.

 

지금은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옛 시절에는 현감이 파견되었던 안의면.

안의면 광풍루 뒷마당에는 2층 누각 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5호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商務左右社接長 河璟詢褒善不忘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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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음현이라 불리웠던 안의면 광풍루를 돌아보면서.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이 누각은 1412(태종 12)에 당시 이안(利安, 안의의 옛 이름) 현감이던 전 우(생몰 연대 미상)가 건립하였는데,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였다. 그 후, 1425(세종 7)에 김홍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으며, 1494(성종 25)에 안의현감이던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면서 이름을 광풍루로 바꾸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불타는 등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풍루는 정면 5,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였으나, 처마 돌출이 작기 때문에 호방하고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 읍내의 학사루와 유사한 건축 양식이다. 광풍루는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을 풍류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누각 위에 걸린 옛 시인의 글귀만이 옛 금호강변의 아름다운 '빛과 바람(광풍)'의 느낌을 전해 줄 뿐이다.

 

 

 

 

 

의병대장문태서기공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16

관리자 : 함양군

 

의병대장 문대서 기공비는 안의면에서 거병한 의재 문태서(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1963)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703월에 건립되었다.

 

장군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던 중 1905년에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하자 금강산을 나와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 선생의 피체 이후 뒤를 도모하였다. 1907년에 일제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해산된 군대가 모두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장군은 덕유산을 근거지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전라도 등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하고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전국적 의병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진공이 중지되자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몰린 장군은 유격전을 벌이다 19128월 본가 방문 중 왜국밀정의 계략에 빠져 피체, 1913년 서울에서 34세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상무좌우사접장 하경순포선불망비(商務左右社接長 河璟詢褒善不忘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5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안의를 중심으로 한 상무좌우사의 접장 하경순(1875~1946)의 공적을 기려 안의 상인들이 1911년 세운 비석. 상무사는 1899(광무 3) 설립된 상업 관장 기관이다. 이보다 앞서 1883(고종 20)에 설립된 해상공국이 2년 뒤 상리국으로 개칭되면서 등짐장수인 부상의 단체를 좌단, 봇짐장수인 보상의 단체를 우단으로 불렀다. 상무사는 좌단을 좌사, 우단을 우사로 고쳐 불렀다. 지역경제사 연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함양여행] 함양의 문화재에서 배우는 역사공부, 안의면(, 안음현) 광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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