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도 있습니까?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은 웃는다고 하는데...

 

1980년 초 강원도 원주에서 군 생활 시절, 군복 어깨에 달고 다녔던 1군사령부 부대마크. 제대하면서 떼어내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의관님, 제가 죽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으니 집에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군 병원에 입원한 나에게 군의관은 “집에 연락할까”라는 짤막한 물음에 대한 나의 애절한 소망이 담긴 답변이다. 이어 군의관과 나의 대화는 잠시 이어졌다.


“죽을 정도로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야. 치료만 잘 하면 나을 수 있어.”

“그렇다면 집에 연락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 연락하지 말라는 거지. 부모님께 알려야 하지 않겠나?”

“완치가 가능하다면 굳이 부모님께 연락해서 걱정을 끼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거제도에서 원주까지 거리도 멀고, 오는 내내 근심걱정 가득하실 부모님이 오히려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정하사, 부모님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네. 알았어. 연락하지 않고, 치료 잘 할게.”


제대를 10개월 앞둔 1982년 10월 31일 새벽. 잊혀진 계절처럼 시월의 마지막 밤은 내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단지, 그날 아침 그 고통이 다가올 줄을 미처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 전날 숙박한 강원도 홍천에서 군용 지프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인제로 향했다. 당시 특수임무를 띠고 야외활동을 하던 때라 강원도 전역이 나의 근무지였다. 굽이굽이 진 산악도로로 들어서자, 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신작로는 큰 돌멩이로 빼곡했다. 거기에다 때 이른, 내린 눈은 차의 진로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에스 자 모양으로 굽이진 도로를 회전하는 순간 차량의 바퀴는 밀리는 듯 했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는 순간 중심을 잃은 차머리는 절벽으로 향했다. ‘찰나’는 이런 때 쓰는 용어일까. 순간에 벌어진 일은 인간의 기억을 삭제해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프는 50m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다 큰 소나무에 걸렸고, 책임자인 중사와 운전병 그리고 나는 비닐 카버로 된 차창 밖으로 튕겨져 나와 버렸다.


“정하사! 우리가 여기 뭐 하러 왔지. 뭐 하러 왔어?”

“...”


두 팔과 두 발로 기다시피 도로에 먼저 올라간 중사는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운전병도 저 멀리 가물가물 희미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추위와 고통에 정신을 차릴 즈음, 손으로 얼굴을 훔쳐보니, 그제야 피투성이가 된 나를 알 수 있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게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암흑에만 공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새로운 정신이 들었을 때 중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기억을 잃을까봐,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 주려는 배려였던 셈이었다.


살아야만 되겠다는 의지로, 50m 급경사 눈밭을 네 발로 기어올라


쌓인 눈은 손바닥을 얼게 했고, 신경을 마비시켰다. 설원에서 목숨을 건 진한 영화보다 더 진한 장면의 주인공이 돼 버린 나. 오직 ‘살아야만 되겠다’는 의지 하나만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50m 돌밭으로 된 급경사를 네발로 기어오르는데, 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단 하나 투철한 군인정신(?)만을 가진 채.


세상은 참으로 비정하고 무정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도로변에 올라서자 살을 에는 추위는 저체온 증으로 빠져 들게 했다. 다행히 중사와 운전병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추위에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나를 돌봤지만, 더 나아질 리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트럭 한대가 경사진 길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일행이 손을 들고 태워달라고 요청했다.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고 겁을 먹었는지, 그냥 지나치는 트럭. 야속하고 원망 가득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치밀어 올랐다.


또 다시 가늠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즈음, 하루에 세 번 다닌다는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인지 버스 안에는 위생병이 있어 응급조치도 받을 수 있었다. 인제에 도착하고 민간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일곱 번째 늑골이 부서지면서 폐를 찔러 기흉(공기 가슴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어 간단한 치료 후, 군 복무지인 원주 병원으로 후송이 시작됐다.


기흉으로 누워만 있어도 호흡하기가 곤란한데, 비포장도로로 덜컹거리며 달리는 후송차량은 나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끊이지 않는 고통은 고함을 내뱉도록 시키며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마취라도 해 주었으면 고통이라도 덜할 것을, 모두가 다 원망스럽다는 생각이다.


간호사의 정성어린 간호, 희망을 가지다

 


원주 군 병원에 도착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가슴에 약지 손가락 정도 굵기의 주사기를 꼽고, 호스를 꼽았다. 생살을 찢는 고통이다. 그런 나를 보고 ‘잘 참는다’고, 군의관은 ‘대단하다’고 칭찬이다. 참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고통을 누가 알까. 군의관은 계속해서 ‘기침을 하라’고 이른다. 그래야만 폐에 고인 나쁜 피가 밖으로 빠져 나온다는 설명이다. 기침을 할 때 마다 고통도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8주의 진단이 나왔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자식의 소식을 안다면 고향 거제도에 계신 부모님은 어떤 걱정을 했을까? 또 얼마나 불안해 하셨을까?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다. 1주일을 넘게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거뭇거뭇하게 자란 수염도 간호사가 깎아 주었다. 발도 씻겨 준 간호사가 너무나도 고맙다. 한번 씩 던지는 말이 웃음을 짓게 한다.


“허파에 바람 든 사람은 웃는다고 하는데...”


일반병실로 옮기고 8주를 다 보낸 후에야 퇴원 할 수 있었다. 1주일의 위로휴가를 받아 집에 오니, 갑작스레 나타난 자식이 걱정스럽다는 부모님의 눈치다. 핼쑥해진 얼굴 모습으로, 자초지종의 얘기가 이어지자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고 만다. 그리고 ‘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는다.


“연락하면 온통 걱정거리로 가득할 건데, 어찌 연락하느냐고. 죽을 것도 아니라는데.”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후로부터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의 현장으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죽을 수도 있습니까/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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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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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life-lineup.tistory.com BlogIcon +요롱이+ 2013.02.01 1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아무쪼록 남은 하루 평안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