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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이야기

거제도 서복 전설 이야기, 그 진실을 찾아서


27일, 거제서복연구소 워크숍 열려

우리나라 최남단 아름다운 섬 거제도. 2천년 전, 중국 진시황제 방사 서복이 불로초를 캐러왔다는 전설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 삶 속에 뿌리내려 있는 전설이야기. 과연, 믿어야 할까, 아니면, 역사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믿어서는 안 되는 허구일까?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이사장 김병원)가 그 의문점을 풀기 위해 서복 워크숍을 열었다. 이 연구소는 지난 27일, 일운면 소동리 웰빙머드펜션 세미나 룸에서 서복에 관한 워크숍을 개최하였으며, 서복에 관한 관심 있는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하여 열띤 관심 속에 진행됐다. 

27일 오후 2시 정각에 개최한 워크숍은 김병원 이사장의 인사말씀에 이어, 거제대학 이 헌 교수의 특강으로 저녁 7시 30분에야 마칠 수 있었다. 장장 5시간 30분 간 진행된 워크숍은 제1주제인 고대사 특강과 제2주제인 서복 특강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제1주제인 고대사 특강은 우주와 태양계를 비롯한 인류의 기원에 대한 강의로 참석자들의 높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한민족은 무리사회(가족), 마을사회(씨족) 그리고 고을사회(부족)라는 단계를 거쳐 국가사회를 이뤘다면서, 무리사회는 구석기시대, 마을사회는 전기 신석기시대, 그리고 고을사회는 후기 신석기시대이며, 국가사회는 청동기시대라고 규정했다. 고대사 특강은 2천년 전, 서복이 거제도에 불로초를 캐러 찾아왔다는 전설에 대한 의미를 짚어보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제2주제인 서복 특강은 실제로 거제 지역과 관련된 강의로서, 해금강과 와현마을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이야기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 국내에서 서복에 관한 전설 이야기는 대표적인 곳이 제주도와 남해 그리고 거제지역이 중심이다. 

각 지역별 서복과 관련한 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라는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시로미는 한라산 1700m 이상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 한 식용과실이라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 암벽에 새겨진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전해진다. 

  
▲ 서복워크숍 지난 27일 열린 사단법인 거제서복연구소(이사장 김병원) 워크숍에서 거제대학 이 헌 교수로부터 고대사와 서복에 관한 특강이 장장 5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됐다.
서복

이 교수는 19세기말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바위에 이 글자가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암각화는 폭포 위 전분공장의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남해군 미조면 설리마을은 남해를 떠나기에 앞서 해변암석에 떠난다는 표지를 남겨, 설리를 '서리고적(徐吏古跡)'이라 하며, '서리곳'이라 불렀다 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서복의 또 다른 이름)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어서 서복에 대한 한·중·일의 주장에 대해서도 특강은 계속됐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제1설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서복의 최종 도착지는 일본이다. 또 다른 설은 18세기에 조작한 것이다. 서복은 일본에 온 적이 없다는 것. 중국은 제1설로서, 일본 주장이 맞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서복은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 입장일까? '강호사학'에는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 

다섯 시간이 넘는 긴 특강에서 이 헌 교수의 결론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펴면서도 진지한 모습이다. 거제도와 서복에 관한 연구를 하는 단체에 대한 진심어린 고언일까? 이 교수의 결론은 이렇게 맺는다. 서복이 동도(동해 쪽으로 항해) 하였을 당시 항해술이 어떤 것이었으며, 한중일 간의 해류는 어떠했는지. 서복이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었던 문자는 무엇이었는지. 남해석각의 위치, 불로초의 진실은 무엇인지. 왜, 지금 서복문화에 관심이 높고, 한중일 세 나라가 서복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 역사의 전설화와 실체를 찾는 노력과 진시황제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의 역사적 인식과 사명은 무엇이며,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 오랜 옛날, 인류가 생겨나고 공동체 생활을 했던 시절. 의식적 행동이었든, 삶의 한 방식이었든 간에, 최초의 인류는 삶의 기록을 흔적으로 남겼다. 벽화라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 벽화를 이해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아주 해박한 지식으로. 동굴 벽화가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 많은 전설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사실이다. 문자가 없던 아주 오래된 시절, 우리는 당시 삶의 기록을 어떻게 남겼을까? 할머니가 자식에게, 자식은 그 손자에게, 그 손자는 그 다음 자손에게. 구전에서 구전으로. 어느 날 문자가 생기고, 구전된 이야기는 진실(?)로서 문자로 기록된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 내려 있는 전설 이야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서복은 중국 최초 황제인 진시황제의 방사로 불로장생을 꿈꾸는 황제를 위해 영약인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두 차례에 걸쳐 동도를 했다는 실존 인물로서, 중국 통사인 사기(史記) 중 '진시황본기'에서 전하고 있다. 

거제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서복에 관한 이야기. 지금으로서, 이렇다 할 역사적 근거와 자료는 없는 현실이다. 문자가 없던 시절의 진실 찾기 이야기는 그래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