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댐휴게소에서 장흥댐을 보며 ‘실향의 한’을 느끼다
/장흥여행/장흥 가볼만한 곳
장흥댐.
장흥댐휴게소에서 장흥댐을 보며 ‘실향의 한’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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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목포여행을 마치고 영암 도갑사를 들러 귀가하는 길.
국도 23호선을 타고 장흥IC를 향하던 중 장흥댐휴게소에 잠시 들렀습니다.
장흥댐에 갇힌 물은 오후 햇살을 받아 은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 여러 개의 비와 돌탑이 있어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수몰로 인한 실향의 한을 안은 이 지역의 진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풍 역시, 아직까지도 ‘실향의 한’을 버리지 못한 채,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국가발전의 미명아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정든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1974년 8월 25일, 일요일 아침.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입니다.
트럭 한 대 분량도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짐칸에 싣고, 내 삶을 포장한 그 짐에 앉아 식구들은 정든 집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까요, 참으로 많이도 울었습니다.
붉은 원 부분이 내 고향인 당시 거제군 장승포읍 아양리 2구 당목마을. 지금은 대우조선해양 본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수만 번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고향’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는, 노랫말에도 나오는 그 ‘고향’ 말입니다.
장흥휴게소에서 장흥댐을 바라보며 이곳 수몰민들의 애환을 그려봅니다.
비에 새겨진 문구 하나하나 빼 놓지 않고 읽어 보았습니다.
같은 실향민의 편에서 그 진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갈두마을 망향비, 단산 망향비, 고향만필 등 비에 새겨진 글귀 한 자 빠짐없이 여기에 기록합니다.
이곳 지역에 살았던 분들께서 제 블로그를 방문하신다면, 그 옛 추억으로 한번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실향의 한
머언 옛날 조상님 적 생활 터전 여기 자아 논밭 일구어 마을을 꾸며 살 때 뒷산 높은 바우 칡넝쿨이 무성하여 마을 이름 갈머리(갈두)라 한 것인가?
병풍바우 문바우재 돛대봉 뒤에 두고 범바우산 엎드려서 청용 백호 감싸 안아 안산을 바라보니 동네 명당 여기로세
아들딸 많이 낳아 자자손손 지켜오며 한 성 받이 아니어도 친족처럼 다정하여 귀한 음식 나눠주며 아까운 줄 몰랐어라.
마을 앞 당산나무 오백여 년 살아오며 삼복더위 시원한 그늘 길손들도 쉬어갔고 주민들 희노애락 길이길이 보전 할 때
국책사업 장흥댐이 많은 물을 가두어서 우리들 정든 고향 깊은 물에 잠기고 다정했던 이웃들은 곳곳으로 떠났네.
이곳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2006년 4월 30일
갈두마을 실향인 설립하고 출향인 후원하다.
생산기반
식량생산 : 갈머리들, 강동들, 들레기들, 내월들, 둔지들
부식생산 : 집 주위 텃밭, 들정지 밭, 고깔바우 주변 밭, 복골 밭, 늑룡들 밭, 등
농업용급수원 : 갈머리보, 강동보, 들레기보, 내월보
기타생활관련보 : 서답보, 때칠보, 둔지보, 합수보
물고기와 고동잡고 개구쟁이들 멱 감으며 물장구치고
주민식수원 : 옛날 우데미, 서당골 ‘들샘’ 2개소와 바가지샘 4개소로 생활하여 몹시 불편하였으나, 1978년 7km 떨어진 어응골에서 간이 상수도 물을 끌어와 편리하였음.
주요지명
마을 앞 동편
1km 지점 송대모퉁이(산 위 사군정), 동북 6km 지점 보림사
서편
1km 지점 유치초등학교, 유치중학교, 송정 2구 배바우마을, 배바우골
서남
1km 지점 유치면 소재지 장터마을
마을 뒤
복골재, 물통골, 안장바우, 뒷재, 고깔바우, 깃대봉, 깊은골, 문바우재, 배틀바우, 새빳등, 서봉산, 스무골재, 복송갬이, 고개넘어, 들정지, 산바레기
<간추린 역사>
o. 문화재 발굴<호남문화재연구원>로 마을 앞 일대에서 선사시대 주거지와 지하묘지, 고인돌, 청동기시대 <기원전 2000년> 유물인 돌도끼 화살촉, 옹관묘, 등이 다수 발굴됨.
o. 1584년 장흥군 미산면 당춘리 건너 마을 늑룡리로 입주한 문위세의 4남 문홍미가 이곳 갈두리에 정착함.
o. 1910년 경 김, 마, 문, 모, 오씨 등이 거주함.
o.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갈머리’를 ‘송정리’로 개편함.
o. 1945년 해방 당시 ‘강동’, ‘공수평’과 합하여 ‘송정1구’로 변경되었고, 당시 이곳에 고, 김, 나, 마, 문, 백, 변, 양, 이, 장, 김, 정, 추, 최, 한씨 등 70여 세대가 거주함.
o. 1950년 6․25 동난 시 전 주민이 피난을 떠났고, 가옥 전소로 마을이 초토화됨에 따라 많은 분들이 객지로 나가 정착하게 됨.
o. 1952년 봄부터 마을을 복구하여 60여 세대가 살다가 이농현상으로 도시로 떠나고, <강 1세대, 김 1세대, 남 1세대, 문 22세대, 박 1세대, 신 1세대, 안 1세대, 양 1세대, 임 1세대, 조 3세대, 최 4세대> 등 37세대가 다정하게 살다가 장흥댐 건설로 소몰지에 포함되어 2002년 가을에 집들이 헐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산 함.
단산마을 영가
丹山月(단산월)
저기 저 두륜봉 밑 단산인의 옛터전
발길이 닿지 못해 망연히 바라보니
길손이 묻는구나 도원(桃源)을 잃었는가
물 건너 옥녀봉이 토라져 앉는데도
한달음에 달려가 달래기 어려우니
길손아 묻지 마라 상전(桑田)을 보리로다
든실한 말바우산아 가까이 내 왔으니
별주부를 불러내 수중 자취 일러다오
뒷깍금 송죽들은 백세(百世) 청청하겠지
고 향 만 필
호남의 청정지역인 장흥 유치의 아름다운 단산마을은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2km 상간의 두륜봉 밑에 100여 호가 정답게 살고 있었어라. 그런데 장흥댐이 건설되어 ‘이주하라’ 한사코 등을 떠민 저들을 심판치 못하고서 각산해 어느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거나. 친구야, 밀리어 떠나던 그날 파르라니 떠는 풀포기를 두고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라.
그 옛날 오색 봉황이 마을을 감싸 안고서 오음을 토했었지. 강변 개밥나무에 묶인 황소가 영각을 거듭해도 청수보 맑은 물엔 아이들 멱 감는 소리만 요란했네. 시앙등 장상골에 초군들의 노랫소리 창창히 들려오고, 개벽 너른 들에는 격양가 드높았네. 동각 서당에는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 우렁차고, 우대미 아래대미 골목길엔 아짐씨들 물 긷는 소리 왁자지껄하였었네. 사정나무 밑에서는 때 아닌 꽹과리 소리에 오수의 단잠을 깨고, 뒷동산 별신제 나팔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하였었지. 영귀정 치성재 근처 교목에는 매미소리 시끄럽고, 단강 여울목에 물결소리 은은했네. 초가을 뒤란 알밤 터지는 소리에 놀라 누나의 앙가슴을 파고들었지.
빈재를 넘어 보름모통이 돌아들면 떡시루 실은 마차 큰 말이 끌고 가니 시루봉과 두륜봉 말바우산이랬지. 피재를 넘어 월천을 지나오면 옥녀의 장롱이며 패물들이 즐비해 보골과 농골 옥녀대라 했었네. 덤재를 너머 둔지봉 밑 돌아서면 초군들의 피리소리 아홉 봉황 춤을 추니 동막골 안검단이 댓골이라 하였었네.
이곳 옛 송정리 갈두마을 뒤편에서 옛터를 바라보니 상마 세전가옥 보이잖고 뒷깍금 청솔만이 어서 오라 하누나. 아무렴, 봉명산 갈미봉 앙사리깍금을 들쳐 매지 못하고 허겁지겁 나왔어라. 둔전보 청수보 지천보에 넘실대는 명경수를 퍼오지도 못했네. 마당배미 납구배미 상자배미도도 버려두고 나왔었네. 당산 방청수 마초장이 밭들도 그냥 두고 나왔었지. 다만, 영귀정 치성재 시혜각만을 이고지고 나왔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던가.
아서라, 서글픈 마음 어쩌지 못해 망향비만 어루만지다가 뜬구름에 길을 물어 발길을 돌리나리 금후 몇 번이나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날거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이내 망부석이 되어도 좋을래라. 그러면 그렇지, 저만치서 날 부르는 이 누구일까. 어디선가 국화향기 홀로 아득하네...
2006년 9월
위 종 대
단산리 연혁
오호 통재라! 국책사업 시행으로 탐진강 상류에 장흥댐 성토되어 조상 대대로 지켜 온 고향마을이 주장돼 선인의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며 여기 이 빗돌에 우리 단산 마을의 연혁을 새기노니 후인은 애써 읽을지어다.
마을의 옛 이름은 검단이라 했다. 마을 앞 도로변에 4기의 커다란 지석묘가 있었으며, 장흥읍지(1747년, 정묘지)에 내검단이 삼한고기로 기록되어 있어 3천 년 전 청동기시대부터 성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사에 봉출어단산하여 본 마을의 주산 두륜봉(두리봉)과 조산 시루봉(증봉)에 아홉 봉황이 마을을 늘 점검하며 놀았기로 예전에 검단이로 불리우다가 일제 강점기에 단산으로 개명하였다.
본 면 국사봉의 정기가 시루봉에 맺혀 주암 돗대봉과 송락 기역산이 좌우를 감싸안아 연년이 태평성대였다. 마을 앞 단강 너머에는 가지산정 신선들이 수인산 나들이에 우리 안산 봉명산(옥녀봉)의 우측 가마봉과 좌측 길마봉에 올라 음풍농월하였다.
아무렴, 우리 마을이 청구의 도원이요 근역의 십승지였던 것이다. 고허 내검단(안검단이)에 남평문씨, 원주이씨, 김해김씨 등 10여 호가 살았으나 육이오 이후 생활이 불편하여 폐촌되었다. 외검단(단산리)에는 장흥위씨 33, 남평문씨 21, 김해김씨 9, 광산노씨 4, 원주이씨 4, 강을유씨 3, 제주양씨 3, 의녕남씨 3, 죽산안씨 3, 안동권씨 2, 광산김씨 2, 안동김씨 2, 청주김씨 2, 해남윤씨 4, 창녕조씨 1, 인동장씨 1, 남양흥씨 1, 인천이씨 1, 밀양박씨 1, 장흥임씨 1, 영광김씨 1, 경주김씨 1, 낭주최씨 1, 진주하씨 1, 해주황씨 1, 진주강씨 1 등 100호 이상의 대촌을 이루어 참으로 의좋게 지냈다.
단산리 상기를 살피건대, 서기 1680년경 남평문씨 이우께서 아들 필서, 필한, 필거 삼형제를 데리고 이웃 오복동에서 이주해와 내검단 초입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후 80여 년이 지나 장흥위씨 수장, 수택 형제분이 합류해 양가문의 날로 번창하였다. 또한 농토가 넓고 비옥하여 산물이 풍족하고 민심이 후하였다. 3백여 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향약과 가례의 양속이 이어져 널리 행의지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다만, 한국동란 시 온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고서 흩어졌다가 수복되어 각기 자기 터에 초막을 지어 재기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장흥댐 건설로 이제는 우리들의 안태본을 잃어버린 영원한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오호 애재라! 금일 벽수에 잠긴 실지를 망연히 바라보나니, 무상한 시대의 변천을 탓해 무엇하랴. 이제 우리 헤어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006. 9
문 정 배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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