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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30년 만에 다시 보는 '죽풍'이 쓴 <전우신문> '유격훈련'


30년 만에 다시 보는 '죽풍'이 쓴 <전우신문> '유격훈련'


1982년 12월 1일자 발행한 <전우신문> 기사



유격훈련

십여 미터 전방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뽀얗게 낀 안개 속을 완전군장을 한 유격대 교육생들은, 침묵만을 지키며 교육장까지 대열을 갖춰 행군에 열을 올렸다. '눌러 쓴 철모 밑에 충성이 불타고 백두산까지라도 밀고 나가자'라는 군가와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손을 흔드는 꼬마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 답례하는 모습이, 전쟁영화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내가 어릴 때 배낭을 짊어진 군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용기가 나고 힘이 솟아 나는것 같았던, 기분에 씩씩한 군인이 되겠다는 나의 자그마한 꿈이 이제는 성취되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유격대 입소식을 마치고 난 후 PT시간부터 본격적인 유격훈련에 들어갔다. 찌렁찌렁한 반복구호 소리가 앞산을 몇 번이나 메아리쳐 돌아오게 하였으며, 훈련소 교육을 받을 때처럼 군기가 들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교관의 지시와 빨간 모자의 조교통제에 척척 움직였다.

훈련 이삼 일 째도 기본체조와 기초 장애물 코스로 이동하면서, 실전의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적을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 인내력, 담력, 체력을 단련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악코스에서는 힘이 들었고 높은 절벽을 보니 정신이 아찔했으며 현기증도 났다.

숙달된 조교의 교장설명 및 시범에 교육생들로부터 많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뒤 이어 교육생들도 해 보았지만 마음먹은데로 쉽게 되지를 않았다. 산악훈련중에서도 수평이동 코스는 간담이 서늘했지만, 허공을 가로지르는 상쾌함과 신선한 공기가 좋았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과 푸른 강줄기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힘찬 유격대 구호와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겁먹었던 마음을 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은 군인이기에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훈련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더욱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부대에 귀대한 첫날밤 지나간 일주일을 생각해 보면서, 퇴소식 때 유격대장님의 훈시 중 자대에 가더라도, 제대하는 그날까지 착실히 군 생활하고 군 발전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참다운 군인상을 정립해 보겠다는 마음과 유격훈련을 통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남북한 무력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군인이 국가에 충성하고 자신의 정신무장을 더욱 강화하는 길만이, 민주적 통일에 한발 앞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일주일간 쌓였던 피로를 풀었다.

                                                                                                <강원도 원주시 사서함 8호>

1982년 12월 1일자 <전우신문> 기사에서


위 글은 '죽풍'이 군대생활을 하던 1982년 11월 6일부터 13일까지 1주일동안 강원도 원주시 간현유격훈련장에서 유격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한 후 쓴 글입니다. 당시 군인들이 읽던 <전우신문>에 기고하여 그 기념으로 스크랩하여 보관하다 최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지금 보니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슬며시 번지는 느낌이네요.

그 이유로는,

1. '군인은 유격훈련을 통하여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부대장의 훈시를 홍보(?)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2. 문장이 너무 길어 숨쉬기가 곤란한 느낌(당초 기사와 내용은 다르지 않지만, 중간 중간에 콤마(,)를 넣어 읽기 지루하지 않게 편집하였음.)입니다.
3. 그래서 요즘은 한 문장 글을 쓰는데 60자를 넘기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짧은 문장이 호소력이 있음.)

'죽풍'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군에 자진하여 지원 입대, 강원도 철원 GOP에서 자랑스럽게(?) 만기 전역을 하였습니다. 
잠시 옛 추억을 되돌아보았습니다.

30년 만에 다시 보는, '죽풍'이 쓴 <전우신문> '유격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