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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상지역

마지막 가는 가을 소매를 붙잡는 나


앞만 보고 달려온 33년의 세월, 산행에서 배운 인생이야기
 
  
▲ 정열 붉게 타는 단풍잎이 정열을 뿜고 있다. 인생도 저렇게 정열을 뿜으며 살고 싶다.
정열

한 해로 친다면, 새해 초 꿈과 희망을 가득 실은 배는 항구에 정박할 시간이건만, 무슨 연유인지, 급하게 서두르는 마음 하나는 긴 항해를 위해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려는 듯, 몹시 서두르고 있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긴 고동소리. 다급함은 몸과 마음을 더욱 재촉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날 동창들을 보고 싶은 설렘 때문일까. 

고교시절. 그 당시는 우리나라 대부분이 시골이었지만,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창과 헤어진 지 33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이다. 얼굴엔 듬성듬성 여드름이 나 있었고, 세련미라고 볼 수 없었던 촌티 나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 추억으로 남은 동창들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껏 같은 동네에 살고, 그 동안 가끔 만나온 동창들은 정반대로 새로운 이미지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 가을단풍 떨어지는 가을단풍이 내 소매를 붙잡고 있다.
가을단풍

가을이 한창 떨어지고 있는 11월 셋째 주 일요일(16일). 마산 무학산 입구 서원곡 주차장은 마지막 가을 산행을 하기 위한 등산객들로 붐볐다. 대형버스를 타고 간 일행을 보태니 꽉 차는 분위기다. 시끌벅적한 시골장터가 따로 없다. 한 세월 보지 못한 여자 동창들은 끼리끼리 부둥켜안고, 발을 구르며 난리법석이다.  

남자들은 어깨를 가벼이 포옹하며 고교시절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한다. 그런데 남자동창들은 그럭저럭 알 것만 같기도 한데, 여자동창 몇 명은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감했지만, 여자동창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잠시나마 반가움은 식을 줄 몰랐고, 인사 나누는 데만 한참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각자의 개성 있는 얼굴모습에서  그간 앞만 보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장편의 인생역정 드라마를 볼 수 있었고, 삶의 형체를 찾을 수 있었다. 

  
▲ 인생의 산행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여력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의 모습이다.
인생

그렇게 산행은 시작되었다. 십여 분 지났을까, 급경사의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는 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여력도, 없었다. 힘에 부쳐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야말로 진지한 삶의 모습과 똑 같다. 산을 오름에 있어, 그것도 정상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힘들지 않는 시간은 없다. 그래서 산에서 삶을 알고 인생 공부를 한다고 했던가. 

힘든 시간이지만, 등산길 옆으로는 좋은 글귀의 팻말이 몇 개 서 있다. 꼭, 등산객들에게 교육 시킬 요량인 것만 같다. 좋은 말이다.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어디 그렇게 쉽게 될 일인가. 그래도 가슴에 새겨 어려울 때 한번쯤 자신을 뒤돌아보리라는 생각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가장 어진 것

그러므로 그를 사람 중의 왕이라 하네

생각을 다스리고 몸을 길들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이루나니

(법구경에서)

 

  
▲ 동창 억새무리가 마산만을 내려다보며 제각각 하늘거리고 있다. 멀리 마창대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억새

육십여 명이 한꺼번에 출발했지만, 힘에 부쳐 간격도 멀어지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대오가 흩어진다. 산 중턱 하나에 올라서니, 멀리 꼭대기가 보인다. 저기가 정상이라면, 삼십여 분만에 오를 것만 같다.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이 얼마치 남았냐고 묻지도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상이라 생각했던 그곳에 올라서니, 저 멀리 학의 형상을 한 무학산 정상(해발 761.4m)이 보였다. 허탈했다. 절친한 친구에게 속은 느낌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인생이며, 산행이다. 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을 전문으로 다니는 사람들이야 별로 높지 않다고 하겠지만, 산의 높이로만 친다면, 해발의 시작점이 수면과 별 차이가 없는 터라, 내륙의 일천 미터 급의 산과 비슷하다 할 수 있으며, 그리 만만히 볼 산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산행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도 나눌 법도 한데, 힘이 드니 말할 기운도 없고, 조용히 사색하며 혼자 걷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 인생역정 제몫을 다하고 떨어져 편안히 쉬고 있는 잎사귀.
인생역정

노랗게 물들어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힘겹게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잎사귀 하나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떨어질 것만 같이 위태위태하다. 땅바닥에 벌써 떨어져 나뒹구는, 그래도 형체만이라도 원형대로 갖춘 낙엽은 편안하게 쉬고 있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 산산조각 부서져, 다른 나무의 밑거름이 될 낙엽 부스러기는 희생의 또 다른 모습이다. 계속되는 가뭄에도 소나무 밑동에 새파랗게 난 이끼와 갈바람에 이리저리 뒤척이는 억새에서 인생 산행을 경험하고 있다. 

  
▲ 무학산 멀리 철탑이 있는 곳이 해발 761.4미터의 무학산 정상이고, 365 건강계단이 보이며, 아래 평평한 곳은 서마지기터다.
무학산

이것저것 사색하며, 마침내 눈앞으로 정상이 보이는 중턱에 올라섰다. 아래로는 널따란 평지가 보인다. 농토 서마지기 크기의 서마지기 터다. 정상까지는 나무 계단이 설치돼 있고, 건강계단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마음속으로 계단을 세어 봤으나, 이내 그만뒀다. 계단 사이에 숫자가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자신이 세어 보면 좋으련만, 내가 할 일을 남이 해 준 것만 같아 씁쓸한 기분이다. 꼭대기까지 365계단이다. 일 년 동안 내내 걷고 또 걸으며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일까. 

  
▲ 365건강계단 서마지기에서 정상까지 이르는데 설치해 놓은 365개의 나무계단. 365일 내내 건강하게 살라는 의미일까.
365건강계단

먼저 도착한 동창 네 명이 충무김밥을 먹고 있다. 산행에 있어 충무김밥은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간편하기도 하지만, 맛도 일품이다. 귤도 마찬가지. 귤의 수분은 목마름을 채워주고 단맛은 피로감을 없애준다. 힘든 산행 끝에 먹는 김밥과 귤 맛은 산행에 있어 갖추어야 할 필수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정상의 넓은 터에는 하나 둘씩 동창들이 모여들었다. 산행 중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기념 촬영은 기본. 사람 스무 명이 모이면, 틔는 사람이 꼭 한 사람 있다고 했던가. 한 동창이 틔고 싶은 모양이다. 

  
▲ 정상탈환 거제 해성고등학교 23회 졸업생이 33년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사람 스무명이 모이면 틔는 사람이 꼭 있다고 했던가. 앞자리에 앉은 그는 이날 반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정상탈환

마산만을 내려다보는 무학산은 태극기를 머리에 이고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전쟁터에서 꼭 진지를 탈환한 것만 같다. 무명용사들이 아니라 거제 해성고등학교 23회 졸업생들이다. 그런데 고지를 탈환한 동창은 출발할 때 인원의 반이 조금 넘을 뿐이다.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중에 연유를 물으니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정상을 올랐으니, 하산을 아니 할 수는 없다. 언제나, 정상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산 길은 쉬우리라 생각했건만, 오르는 것 못지않게 힘들다. 경사진 곳, 두 다리에 버티는 힘이 더욱 필요하다. 

  
▲ 행복 김해에서 왔다는 유진(10), 경진(6)과 아빠엄마. 아이들은 네살때부터 산을 올랐고, 매주 한번 정도 가족끼리 가까운 산을 찾는다는 이 가족은 행복을 가득안고 산을 내려오고 있다.
행복

예쁜 여자 아이와 남동생 그리고 아빠엄마 한 가족이 행복을 가득안고 산을 내려가고 있다. 김해에서 왔다는 이 가족은 매주 한번 정도 가까운 산을 다니며, 딸 아들 모두 네 살 때부터 산을 다녔다고 한다. 어릴 적, 힘들 때는 어깨에 태워 산행을 했지만, 이제는 제힘으로 다닌다고 하니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단다. 세 살배기 아들을 목말 태워 산을 올랐던 추억이 순간 떠올라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그 녀석은 최전방에서 제대를 얼마 남겨 두고 있지 않은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 만추 하산길에 만난 만추.
만추

무학산, 두 시간을 올랐고, 한 시간을 내려왔다. 정상을 오르는 것은 두 배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이미, 정상을 밟은 동창도 있지만, 아직도 7~9부 능선을 오르는 동창들도 많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정상의 고지를 탈환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정상이 꼭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실제 산행에 있어서도, 많은 동창들이 정상에 오르지 않았거나 못했다. 그들 나름의 이유와 사정은 있으리라.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도 산을 오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앞만 보며 산을 오르고, 화려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단풍을 보며, 잎사귀 지는 가을에서, 33년 만에 만난 동창들과 함께 인생의 산행을 한 소중한 하루였다. 마지막 가는 가을. 다시, 인생의 험한 항로를 여행할 배는 긴 고동소리로 소매를 붙잡고 있는 나를 재촉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거제도에 있는 해성고등학교 23회 동창들을 33년 만에 만나게 해 준 회장단과 멀리 서울에서, 부산에서 온 동창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특히, 황성부 동창에게는 감사의 메시지를 별도로 전합니다. 그는 함안에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화합의 한판인 뒤풀이도 깔끔하게 마무리한 신사랍니다. 동창들에게 해 온 그의 남다른 정을 본다면,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내내 건승하심을 빌어봅니다. 그리고 산행 중에 만난 예쁜 아이 아빠가 이 글을 보고 연락주시면 원본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