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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상지역

[영주여행] 부석사 무량수전,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라는 나무/영주 가볼만한 곳

 

[영주여행] 부석사 무량수전,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라는 나무

/영주 가볼만한 곳

 

 

[영주여행] 부석사 무량수전,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라는 나무

/영주 가볼만한 곳

 

무량수전에서 서방정토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다

 

여행을 함에 있어 같은 장소에 두 번 이상이나 가게 되면 식상할 것도 같지만, 이곳만큼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곳이란,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학교 다닐 적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사찰이라고 배웠다.

 

웬만한 여행자라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어 봤을 터. 이뿐만이 아니다. 무량수전 안 아미타불은 불자들에게 깊은 신심을 나게 하는 큰 힘이 돼 준다. 그래서일까. 두 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찾아가도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곳이 부석사가 아닐까 싶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8월 중순을 못 넘긴 탓인지, 후덥지근한 기운은 온 몸을 휘감는다. 그럼에도 비탈길을 오르는 길은 가볍다. 길가에 물건을 내다 놓고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처절한 삶의 모습이 느껴진다. 밭 언덕에 있는 과수원의 풍경도 눈에 익은 모습이다. ‘태백산부석사’라는 현액을 달고 있는 일주문이 나를 반긴다. 십여 년 만에 만나는 그리움일까. 반가운 사람을 만나듯, 버선발로 달려오는 기분이다. 합장 삼배하며 반가움을 대신한다.

 

 

부석사(浮石寺).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로, 해동 화엄종의 종파로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내에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로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그리고 석등(국보 제17호) 등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보물로는, 당간지주(제255호),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제220호), 3층 석탑(제249호), 고려 각판(제735호) 등이 있고, 이 밖에도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 지방문화재가 많이 산재해 있다. 가히 문화재의 보고가 아닐 수가 없다.

 

한국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하는 배흘림기둥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높이 우뚝 선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당간(사찰에서 법회 등이 있을 때 당을 건 장대)을 지탱하기 위해 좌우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그런데 이 당간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이 있다. 높이도 4.8m로서 다른 사찰의 것보다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당간을 지탱하는 ‘간공’(지주 가운데 뚫어 놓은 구멍)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대신, ‘간구’(지주 꼭대기 부분에 타원형의 홈을 판 형태)와 ‘원공’(밑바닥에 당간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구멍)으로 당간을 지탱하게 했다. 창건당시 세워진 이 당간지주는 1300년이 지나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부석사의 또 다른 특이점은 가람배치에서 찾을 수 있다. 일주문에서 진입로를 따라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오르면 전각들이 하나 둘 눈앞에 나타난다. 산자락 경사를 적절히 이용한 가람배치는 무량수전 마당에 이르기 전 까지, 전체 전각의 규모를 한 눈에 볼 수가 없다. 숨바꼭질 하듯 찾아내는 전각 하나하나에서 이 사찰의 진미를 느끼게 하는 진정한 참맛이 아닐까.

 

범종루에 이르니 현액은 ‘봉황산부석사’라 돼 있다. ‘태백산부석사’라는 일주문 현액과는 다른 표기다. 알고 보니, 부석사는 봉황산 자락에 자리하지만 봉황산은 태백산의 한 봉우리로, 태백산 품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일주문 현액은 1980년대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정비했다고 한다.

 

 

계단 길을 올라 안양문에 이르렀다. 불교에서 ‘안양’이란 ‘극락정토’라는 뜻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극락정토세계로 간다는 뜻. 좁은 문은,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들고, 이는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춰야 함이리라. 가람배치를 한 사람의 세심한 설계의도가 숨어 있다고 해석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극락세계에 이르니 열려 있는 법당 문으로 통해 보이는 아미타부처님. 황금색 가사를 걸친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이 근엄하면서도 지혜로 가득 차 있는 형상이다.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다.

 

법당 안에 자리한 불상은 대개 남향을 하고 있지만, 이곳 무량수전 아미타불은 서쪽에 자리하여 동향을 하고 있다. 이런 불상배치는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니 그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이 불상은 찰흙으로 빚은 ‘소조아미타여래좌상’으로, 높이가 278cm나 되고, 광배높이는 무려 380cm에 이른다. 어떻게 흙으로 이렇게 큰 불상을 조각했을까 싶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손은 항마촉지인으로 땅을 향하고 있다. 머리 위 상투 모양은 큼직하고 얼굴은 풍만하며, 양쪽 귀는 긴 편으로,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고려 초기 불상으로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석사는 창건에 얽힌 선묘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무량수전 뒤편에는 ‘선묘각’이 자리하고, 설화에 나오는 내용처럼 선묘아가씨가 용을 타고 하늘을 나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설화가 있는 곳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의상대사의 전기와 부석사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중국 등주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무를 때, 집 주인인 선묘는 의상을 흠모하게 된다. 이에 의상은 공부에 전념하고, 선묘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님께 귀명할 것을 다짐한다. 의상이 귀국길에 오르자, 뒤늦게 이를 안 선묘는 바다에 물건과 몸을 던지고 선묘는 용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자 권종이부의 잡귀 무리들이 방해하고, 이에 선묘룡(善妙龍)은 허공에서 변신하여 큰 바위로 변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잡귀들이 혼비백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서 의상은 무사히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쪽 한편에는 큰 바위에 부석(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간 부석사에 몇 차례 들렀건만, 삼층석탑 뒤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길은 처음이다. 이 길 끝에는 자인당과 조사당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인당에는 보물 제220호인 석조여래좌상 2기가 동서로 안치돼 있는데, 서쪽 불상은 9세기 후반기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으로 당시 불교 사상의 특징과 불상 양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인당 아래쪽에는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 처마 밑에는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라는 이 나무는 아직도 조사당 처마 밑에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철망의 보호를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점심은 정갈하고 공덕이 가득 담긴 공양으로 채웠다. 식기를 씻으며, 잠시나마 세속의 때를 함께 씻어 흘려보냈다. 두 시간을 넘게 머문 부석사는 나를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화려한 단청 없이 수수한 모습으로 천년의 세월을 지켜 온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아미타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슴에 담았다. 안양루 너머 펼쳐지는 태백산 줄기의 영험함도 같이 간직했다.

 

 

언제 와 봐도 정겹고, 떠나면 언제 또 볼까 그리워지는, 부석사. 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고인 부석사. 이 좁은 지면으로 부석사를 말하기는 부족하리라. 부석사를 뒤로 하고 일주문을 나서는 발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영주여행] 부석사 무량수전,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라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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