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서 날개를 달아 금강산에서 펴다-2

17년의 잊힌 계절을 다시 찾은 감정을 뒤로 한 채, 11월의 첫날 새벽은 부산한 모습으로 움직여야 했다. 단체여행이라는 것이 시간에 맞춰야 하고,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강원도 최전방 민통선을 통과하고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보며 금강산으로 향하는 발길은 긴장감과 설렘이 한꺼번에 혼재해 있다.

동해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를 조금 지나니 비무장지대다. 사십여 대의 버스는 휴전선을 통과하면서 북한 땅을 지나고 있다. 휴전선, 한국동란의 휴전협정으로 당시 그어 놓은 남북의 경계선으로서, 동서 155마일의 길이에, 50㎝ 높이의 노란색을 칠한 시멘트 말뚝을 200m 간격으로 땅에 박아 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다.

일행이 지나면서 본 말뚝은 동서 간 총 1292개 중 1290번째라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 금강의 단풍 11월의 첫날, 금강의 단풍은 나를 찾아주는 이를 위해 애설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금강산

처음, 두 눈을 통하여 보는 북녘의 땅은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산야에는 푸름도 없고, 삭막하다.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산은 온통 바위뿐이고, 나무도 없는 민둥산이다. 도로변 중간 중간에 서 있는 북한 초병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응시하고 있다.

천막으로 설치된 북측출입사무소에서 검사를 마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여행 단체별로 검사를 맡았다고 해도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객 전체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온정리, 일박이일 머무를 숙소가 있는 곳이다. 금강산은 크게 내금강, 구룡연, 삼일포, 만물상 등 네 개의 여행 코스가 있다.

여장을 풀고 먼저 구룡연으로 향했다. 경쾌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와 사시사철 푸른 담(潭)과 소(沼)를 감상할 수 있는 외금강을 대표하는 코스다. 목란관, 수림대, 앙지대, 상록수,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 비봉폭포, 구룡폭포, 상팔담으로 이어지는 약 4.3㎞의 코스에 4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설명에 조금 긴장되는 느낌이다.

금강산 산행 시에는 주의 사항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산행 시작 전에는 반드시 볼일을 보고 산행을 하라는 점이다. 산행 시 위생실(화장실)을 갈 때 서서 보는 일은 1달러, 앉아서 보는 일은 4달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물상 산행 시 너무나 급해서 1달러를 내고 볼일을 봐야만 했다.

 

  
▲ 목란관 구룡연 코스 초입에 있는 북한이 운영하는 식당 겸 휴게소다. 멀리 금강의 아름다움을 훔쳐 볼 수 있다
목란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본격 산행이 시작됐다. 1200여 명이 한꺼번에 오르는 탓에 비교적 넓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밀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목란관, 구룡연코스 초입에 있는 북한 측에서 운영하는 식당 겸 휴게소다. 입구 다리에서 올려다본 금강산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약 삼십 분을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걸었다. 햇살을 품은 단풍잎이 하늘거린다. 구룡폭포에 이르기 위해서는 총 8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화려한 단풍잎과 여행객의 등산복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 구룡연코스의 두번째 다리 구룡연 코스에는 총 여덟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두번째 다리로서 자연과 사람의 단풍색으로 물들여 놓고 있다.
금강산

 

금강산은 둥글고 뾰족한 바위와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 산이다. 천태만상의 바위는 제각각 모습을 달리하고, 사이사이에 난 잡목은 분칠을 하듯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은빛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비봉폭포다.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폭포로, 금강산 4대 명폭 중 하나이며, 139m의 높이다. 오른쪽에 있는 무봉폭포와 짝을 이룬다고 해서 둘을 부부폭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같이 가는 하얀 은빛의 물줄기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음달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떨어지고, 바람에 흩어져 날리며 물안개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 금강의 암벽 금강산은 암벽으로 둘러쳐진 아름다운 산이다.
금강암벽

 

이곳저곳을 보고 감상하느라 눈이 피곤하다. 금강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카메라에 들어오는 빛의 양에 따라 사진의 선명도가 달라진다. 실물보다 더는 아름답지는 않을지라도, 아름답게 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뒤처진다. 일행은 저 멀리 앞서가고 있다. 한참을 걸었을까, 산골짝 모퉁이를 도는 순간 하늘이 열리듯 앞이 확 트이면서, 눈앞으로 펼쳐지는 자연경관이 장관을 이루고 현기증이 날 정도다.

 

  
▲ 비봉폭포 은실이 휘날리는 듯한 비봉폭포
비봉폭포

 

넓디넓은 바위 폭포를 하고 있는 옥류동 계곡이다. 수정 같은 맑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린다고 하여 붙여진 옥류동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418호로서, 담소의 넓이는 630㎡, 깊이 6m, 길이 58m의 옥수를 담고 있다. 일필휘지 붓의 돌림일까, 절세미인의 치맛자락일까, 옥을 담아 놓은 보석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욕망이 인다.

금강산의 물은 흐르면 비단길이요, 모이면 담소요, 흩어지면 계곡이요, 떨어지면 폭포수요, 마시면 몸에 좋은 약수라 했다고 누가 말했던가? 계곡에 내려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옥수의 맛은 가슴 속 깊이 짜릿한 여운으로 오래 남는다.

 

  
▲ 옥류동 옥을 풀어 깔아 놓은 듯한 옥류동 계곡. 말로써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자연경관이다.
옥류동

 

구룡폭포(九龍瀑布)까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하다. 힘도 많이 든다. 지나온 다리를 세어보니 여덟 번째 다리를 지난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이정표가 5분 남았음을 표시한다. 은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일까, 학의 날개가 구름 위로 나르는 모습일까? 한 장의 큰 바위 덩어리에 옥수가 흘러내리는 구룡폭포. 북한의 명승지 제225호. 외금강 구룡동 골짜기에 있으며, 중향폭포(衆香瀑布)라고도 한다. 높이 74m, 너비 4m이다.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폭포 중의 하나이며, 십이폭포, 비봉폭포, 옥영폭포 등과 금강산 4대 폭포를 이룬다. 폭포의 벽과 바닥이 하나의 화강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옥녀봉의 아름다운 연봉을 배경으로 화강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웅장하고 기세가 있다. 폭포 아래로 금강산을 지키던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13m 깊이의 구룡연이 있다.

 

  
▲ 구룡폭포 상팔담을 흘러 내린 옥수는 구룡폭포를 만들고 그 아래 아홉마리 용이 살았다는 구룡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룡폭포

구룡폭포 옆에는 김규진이 썼다는 '미륵불(彌勒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불(佛)자의 획 길이만도 30m가 된다고 한다.

최치원의 여덟 글자의 시가 구룡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일까?

천장백련 만휘진주(天丈白練 萬斛眞珠)
천 길 하얀 비단이 드리운 듯하고, 만 섬의 진주알을 뿌려 놓은 듯하구나!

아니면, 막걸리에 취한 김삿갓이 이 폭포를 보고 부른 노래일까?

수작은간춘절벽 운위옥척도청산(水作銀杆春絶壁 雲爲玉尺度靑山)
월백운백천지백 산심수심객수심(月白雪白天地白 山深水深客愁深)

폭포수는 은으로 만든 절구가 돼 절벽을 내리찧고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돼 청산을 재면서 흘러간다
달도 눈도 희니 온 천지가 모두 희고
산도 물도 깊으니 나그네 수심도 깊구나

구룡폭포가 정면으로 보이는 관폭정(북한의 보존유적 제1691호)에 홀로 앉아 술 한 잔 취하면서, 김삿갓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어설픈 시라도 한 수 읊조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술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시 한 수도 노래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구룡연 마지막 다리를 건너 상팔담(上八潭)으로 가는 데는 아주 험난한 길로서, 평탄길이 없고,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느낌이다. 실제로 철 계단은 거의 90도에 가까울 정도로 절벽에 붙어 있다.

할머니 한 분이 일행의 부축을 받으며 먼저 내려오고 있다. 부산에서 왔다는 그 할머니는 81세라고 하는데,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코스는 17개의 철 계단에 312개의 계단 수가 말해 주듯, 젊은 사람도 힘든 코스로서, 특히, 직각에 가까운 철 계단을 오르내렸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 상팔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의 이야기인 상팔담. 상팔담을 흘러 내린 옥수는 구룡폭포에서 흩어져 하늘로 흩어진다.
상팔담
  
▲ 상팔담 햇살을 받은 옥빛의 담소는 그 휘황찬란한 보석빛을 반짝거리고 있다.
상팔담

숨을 몰아치며 힘들게 구룡대에 올랐다. 구룡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바위와 계곡과 물줄기와 담소들은 기이한 장관을 이룬다. 옥을 꿰어 만든 아름다운 여인의 목걸이가 연상되지만, 여인의 목걸이보다 더 아름답다. 옥이 있는 소에 햇살이 비치고 하얀 은빛이 영롱한 모습으로 보석보다 더 반짝거리고 있다.

태고의 신비스러움이 지금도 그대로 있는 이 계곡에는 열 몇 개의 소가 있고 그중에서도 빼어난 여덟 개를 골라 팔담이라 하였으며, 구룡동 위쪽에 있다 하여 상팔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구룡폭포가 떨어져 만든 구룡연과 상팔담을 합쳐 구담이라 하고, 이 아홉 개의 못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 천화대와 세존봉의 암석들 구룡대에서 바라본 천화대와 금강의 암봉들. 금강산의 비경을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던가?
천화대

 

어릴 적에 들은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은 서로 같이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지만, 북한의 상팔담에 얽힌 전설은 우리의 것과는 정반대이다. 옛날 금강산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살려주었다. 사슴은 은혜를 갚기 위하여 팔담에 목욕하러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다가 그에게 주었다.

팔선녀 중 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고, 총각은 선녀와 인연을 맺었다. 총각은 사슴의 뜻대로 아들딸 3형제를 본 다음에 선녀의 날개옷을 주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선녀는 금강산이 그리워 다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후 부부는 아들딸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상팔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푸른 옥색의 담소에 선녀가 목욕을 하고 있다. 나무꾼이 되어 아름다운 저 선녀와 하늘나라로 가서 영원의 삶을 살고 싶다.

출처 : 아홉 마리 용과 선녀와 나무꾼의 사랑 이야기 - 오마이뉴스(2007. 11. 09)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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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서 날개를 달아 금강산에서 활짝펴다
  
▲ 설악산 소공원 기개 높은 소나무와 단풍이 조화롭다
가을여행

 

사람들은 그 어떤 무엇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조촐한 이벤트를 벌이며, 각별히 마음속에 새기기도 한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잊혀 진 계절’이라는 노래다.

 

직장 동료 육십 명이 북한의 금강산을 가려고 속초를 찾았고, 시월의 마지막 날을 단풍이 깊게 물든 설악에서 보내는 의미가 남다르다. 17년 전인 1990년 오늘, 시월의 마지막 날을 설악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요일도 똑같은 수요일이다. 당시 산에 미쳐 전국의 이름 난 산을 많이 다니던 때였고, 설악산 정상을 처음으로 올랐기에 그 경험은 가슴 속 깊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 통일대불 청동좌상 통일의 염원을 빌까, 가족의 안녕을 빌까?
 통일대불

 

단풍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산뿐이 아니다. 사람들의 옷도 붉게 물든 단풍보다 화려하다.  그래서 가을은 단풍의 계절일까. 신흥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크고 웅장하지만,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통일대불(統一大佛) 청동좌상. 반세기 동안 겨레를 갈라놓은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는 민족의 비원인 국토통일을 이루고자 설악산보다 더 크고, 동해보다도 더 오랜 대불의 광명에 통일염원을 이루고자 만들어진 청동좌상. 이 석가모니불은 1987년 8월에 착공하였고, 14.6m의 높이에 108t의 청동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한 아주머니가 신발을 곱게 벗어놓고 정성이 가득 담긴 모습으로 절을 하고 있다. 통일을 염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족의 안녕을 비는 것일까? 뒤 이어 절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되지만 불상은 표정도 말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표정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미운 모습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고운자식 떡 하나 더 주고, 미운자식 매 하나 더 들지 않는, 그저 모든 중생들에게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맞이하며 내 보낸다. 사람들은 그런 속 깊은 부처의 자비를 알까?

 

  
▲ 신흥사 극락보전 고즈넉한 산사에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흥사

 

신흥사(神興寺), 653년(신라 진덕여왕 7년) 자장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9층 사리탑을 세워 향성사라고 불렀으며, 화재로 소실된 후 선정사라는 절을 다시 짓고, 그 후 수만 년이 가도 삼재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로 신흥사를 창건하게 되었으며, 당시 지은 법당, 대웅전, 명부전, 보제루, 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어느 불자가 극락보전 앞 중앙계단으로 법당에 오르는 것을 보고, 또 다른 불자가 급히 달려가 옆 계단으로 동행하며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크지 않은 고찰이지만 포근함만큼은 그 어느 사찰과 다를 바 없이 아늑하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밀려 올 때면, 조용한 절집 마당은 늙으신 어머니의 넓은 가슴과 같이 아늑하기만 하다.

 

  
▲ 권금성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신흥사 절 마당에서 기와지붕 사이로 바라다 본 케이블카
신흥사
  
▲ 단풍 절집 지붕이 화려한 단풍을 머리에 이고 있다
 단풍

 

가을 산을 즐기려는 사람을 실은 케이블카는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권금성으로 쉼 없이 오르내린다. 절집 기와지붕에도 노란 단풍이 머리를 이고 있다. 붉게 물든 담쟁이넝쿨은 토담 위 기왓장을 감고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다.

 

  
▲ 울산바위 신흥사 입구에서 바라다 본 울산바위
울산바위

 

저 멀리 울산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산행 시간도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예전에 가 본적이 있기에 울산바위 산행을 포기하고 조금 더 가까운 비선대로 향했다. 비선대로 가는 약 2km의 거리는 걷기가 아주 편한 길이다.

 

  
▲ 단풍나무 숲속 길 낙옆이 떨어진 숲속 길은 푹신한 양탄자 길을 걷는 기분이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파고들며 화려한 색깔로 나뭇잎을 채색하고, 세찬 바람은 눈에 시릴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단풍잎을 매몰차게 내팽개쳐 버린다.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가 얼굴에 떨어진다. 한꺼번에 떨어진 나뭇잎은 그대로 쌓여 푹신한 길을 만들고 편하게 걷도록 해 준다. 같이 온 일행은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서 묵묵히 산길을 걸으며 인생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절개 수십 년이 될 듯한 푸른 소나무가 흙도 없는 바위에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절개

 

몇 년을 자랐는지 크기로 봐서 수십 년은 된 듯, 큰 소나무 한 그루가 흙도 없는 바위 틈에서 강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비바람과 추위와 싸워 이겨내고 푸름을 유지하는 소나무야말로 절개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이유일까. 모든 사물은 제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할 뿐. 그래서 여행은 가끔 혼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다.

 

  
▲ 장군봉과 적벽 비선대에서 바라 본 장군봉과 적벽
 비선대

 

한 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옛날 마고선인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비선대에 도착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를 듯 두 세 개의 암벽이 절경을 이루고, 용틀임하듯 하늘을 날아가지 못해 아쉬움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의 장군봉 중간 허리에는 금강굴이 있다. 굴 안의 넓이는 약 일곱 평 정도로 그 안에는 자비스러운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어, 믿음이 돈독한 불자들에게는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기도의 장이기도 하다. 천불동 계곡의 맑은 물은 거울이 되어 하늘을 비추고, 흐르는 물소리는 노래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 천불동 계곡의 맑은 물 맑은 물은 거울이 되어 하늘을 비추고, 맑은 소리는 노래가 되어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있다
천불동계곡

 

가을은 꼭 산에서만 느껴야 할까? 저녁식사 후 가을 바다를 느끼고 싶어 해안가를 찾았다. 겨울바다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어쩐지 가을바다의 느낌은 겨울바다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인식이 되지 않는 듯하다.

 

동해의 밤바다는 남해바다와 다른 것만 같다. 파도치는 모양과 크기도 다르고 파도소리도 다르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그 느낌은 나 자신만의 생각이리라.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은 너무나도 깔끔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서 푹신한 모래사장을 걷는 기분은 붉은 양탄자를 걷는 느낌이다.

 

바닷가 의자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하며 다음 일정인 북한 금강산으로의 여행에 대한 상념에 잠겨 본다. 설악에서 날개를 달고 금강에서 날개를 펴고 싶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금강산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이할까 궁금하다. 17년 전, 똑 같은 날짜와 똑 같은 요일에 다시 찾은 설악산은 내게 있어 잊혀 진 계절이었던가?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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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북적대는 가을보다는 자신의 향기를 찾아서
 
  
▲ 가을향기 성불사 계곡에 찾아온 가을
 
 

깊어가는 가을날, 집 밖으로 한 걸음만 내밀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완연한 가을을 느낀다. 더군다나 차를 타고 한적한 농촌 길을 달리다 보면 가을은 더욱 내 가슴 가까이에 와 닿아 있다. 오후 두 시의 가을 햇살을 등에 이고 산야에 흐드러지게 핀 억새. 역광을 받은 하얀 피사체는 사람의 혼을 빼앗아버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빛의 하늘거림은 붉게 물든 내 가슴을 파고 들어와 정신을 잃게 만든다.

 

  
▲ 화려함 붉게 물든 내 가슴속의 가을
 

전국에 이름 나 있는 억새 평원에 주말과 휴일에 수만 명의 등산객이 붐빈다는 뉴스는 깊어가는 이 가을의 소식을 그대로 전해준다. 어떤 이는 자연경관을 즐기기보다는 북적대는 사람 속에서 가을과 사람의 향기를 맡으려고, 또 어떤 이는 자연과 사람 속에서 자신의 향기를 맡으려는 이도 있다.

 

  
▲ 가을의 소리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시월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주 일요일(28일), 전남 광양시 봉강면 백운산 아래에 위치한 성불사(成佛寺)로 자신의 향기를 찾아 나섰다. 오후의 한적한 시간인데, 시골길이 너무나도 조용하다. 벼농사 가을걷이는 대부분 마쳤는지, 들녘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붉게 물든 경치를 감상하며, 사랑하는 이와 얘기를 나누면서 달리는 기분이야말로, 힘든 등반 끝에 시원히 맞이하는 바람의 상쾌함보다 더 좋은 느낌이리라.

 

  
▲ 포근함 하늘을 덮어버린 가을
 

산사로 들어가는 오솔길.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조용히 걷고 싶은 길이다. 차에서 내려 계곡으로 내려갔다. 바위를 돌고 돌아 흐르는 물소리가 영혼을 깨운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은 어느새 잔잔한 고요의 바다에 안착하고,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은 물에 비친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 반가움 형형색색의 가을
 

가을 행락철치고는 너무나 고요하다. 적막감이 감도는 산에는 형형색색 물든 나뭇잎만 일행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이름이 잘 알려진 산보다는, 적막감이 감돌고 외로움을 한번쯤 느끼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별로 커 보이지 않는 사찰입구의 주차장에는 승용차만 대여섯 대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고요함 나의 향기를 찾아서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 많은 산사를 돌아 다녀봤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입구 좌측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입석 앞으로 코끼리 상이 있고, 우측에는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새겨진 입석 앞으로 역시 코끼리상이 있다.

 

코끼리는 불가에서 무슨 상징일까? 석가모니 탄생은 어머니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되고,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 고독 고요한 산사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나뭇잎 떨어져 땅바닥에 뒹구는 소리,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이 삼아 장난치면서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외는 그 어떤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산사에서, 가을 향기를 맡고 자신의 향기에 취해 본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고요하다. 물결의 출렁임 하나 볼 수 없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다. 백운산 도솔봉 아래 화려한 색채로 수놓은 단풍을 홀로 감상하는 맛은 일품이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이름난 산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 단청 단청 사이로 보이는 가을
 

단청(丹靑), 그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인간의 열정과 혼이 서려 있는 전통예술의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다. 단청 사이로 보이는 가을의 아름다움은 두 배의 느낌을 더해 준다. 특히, 조용한 산사에서 혼자만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느끼는 그 감정은 자신이 예술가가 된 듯하다.

 

  
▲ 동반자 외로움을 느끼며
 

길가에 아름답게 피었던 코스모스의 흔적은 없어진 지 오래 된 듯하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가을을 배신이라도 하듯 씨앗만 매단 채 바람에 흔들거린다. 오랜만에 찾아간 친구를 온 동네 수소문하였지만, 찾을 길 없는 것과 마찬가지 느낌이다. 다시, 돌아서는 발길의 무거움도 꼭 이런 감정일까?

 

두 그루의 늙고 늙은 소나무가 형제처럼, 친구처럼, 다정하게 보이지만, 아무래도 그 속사정은 나만이 알 것만 같다. 어젯밤, 별일 아닌 일을 가지고 싸운 부부처럼,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으련만, 그렇게 묵묵히 혼자인 듯, 두 나무가 둘로 있지만 혼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일일까?

 

멋진 공연이나 예술작품 전시회를 보고 집으로 돌아 갈 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충만한 마음에 그 기쁨이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여흥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여행으로 인하여 느끼게 해 주는 만족감과 기쁨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아쉬운 마음으로 조용한 산사의 느낌을 뒤로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또다른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온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면서 각오를 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 감향 자연과 인생의 가을을 느낀다
 

정겨운 시골집 텃밭에 주렁주렁 열린 노란 감을 따는 할머니의 모습이 가을 향기 그 자체다. 감을 손질하는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을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할머니 일생의 가을도, 자연의 가을도, 가을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고집스런 어미 생각이 났다. 평소에 티격태격 다투는 어미와 아들 사이다. 달콤한 감을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어미 같은 할머니한테 한 상자의 감을 샀다. 어미로부터 분명코 비싼 돈 주고 뭐 하러 이런 걸 사왔냐고 따져 물을 게 뻔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 가지 않을 수 없다. 농사짓는 아는 형님한테 얻어 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어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해처럼, 똑같은 거짓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어미의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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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 성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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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아이 면회 가는 길, 국가안보를 느낀 소중한 시간
▲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부르고 싶은 한탄강
새로운 것을 만나거나 체험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설고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5월 26일, 지난 3월에 입대한 아들을 만나러 강원도 철원으로 떠난 여행은, 68일만에, 아들과 만나는 기쁨과 설레임의 동시작용으로 기분은 평소보다 두 배가 넘쳐흘렀다.

▲ 90년대 많은 비로 인하여 뒤로 보이는 정자까지 물이 차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숙박지를 예약하지 않은 탓에 오후 늦게까지 읍내를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역시, 여행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오후 늦게 고석정 관광단지내에 있는 모텔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북한에서 강원도와 경기도를 관통하여 흐르는 한탄강을 보고서, 곧바로, 느낌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미국 애리조나 북부지역에 있는 거대한 협곡인 그랜드캐니언이었다.

▲ 철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새조각상
며칠 전, 비가 내린 탓에 강물은 석회석을 풀어 놓은 듯 희뿌옇다. 강 아래쪽을 보니 조그만 배가 사람을 싣고 강을 오르내린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몸을 실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상류 쪽으로 오르니 물살이 제법 세다. 강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는 기암괴석의 절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배는 상류로 올랐다가 하류로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하얀 물보라가 이는 아주 작은 높이의 폭포가 보인다. 옆으로 지천이 흐르는데, 이곳이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라고 한다.

▲ 정자에 오르면 한탄강의 비경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래프팅으로도 유명한 한탄강은 깊은 곳의 수심이 5m나 된다고 한다. 강 양쪽 절벽의 제일 높은 곳은 대략 40m 정도가 된다고 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 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한탄강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고석정(孤石亭)은 최근에 건축한 듯, 고풍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뚝배기 그릇에 구수한 된장국 맛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정자에 멋들어지게 쓴 편액도 없다. 그냥 수수하다. 정자 옆으로 잔디밭이 잘 조성돼 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 석탑의 층사이에 금개구리가 살았다는 보물 제223호 도피안사삼층석탑
다음날 이른 아침, 다시 강으로 갔다.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는 어제와 변함이 없다. 인생사, 말없이 흐르는 저 물줄기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동차는 최전방으로 향했다. 아들 면회를 왔건만, 이곳 멀리까지 와서 명소를 둘러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동송읍에 있는 도피안사에 도착했다.

조용한 산사의 아침이 평화롭다. 맑은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마셨다. 상쾌하다. 샘터 옆 안내판에는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했다는 도피안사삼층석탑(보물 제223호)의 금개구리 모습의 사진과 설명이 보인다. 절 마당으로 나아가 금개구리가 살고 있었다던 석탑의 틈새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불심이 없어서일까?

▲ 북한노동당 철원군당사
아침 햇살은 한국전쟁 당시 악명 높았던 북한노동당 철원군 당사의 창틀 사이로 비추고 지나간다. 수리를 하는지 비계를 설치하고 공사가 한창이다. 당사 입구 왼쪽 기둥은 총탄의 흔적이 지금도 선명한 모습으로 그 당시의 뼈아픈 기억을 회상해 준다. 천정과 벽면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뚫려 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증거다. 노동당사에서 잠시나마 전쟁의 아픈 기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민통선 제한구역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물차 몇 대만 오갈 뿐, 한창 모내기가 진행 중인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북한과 인접한 민통선 지역이지만 긴장감은 별로 들지 않는다.

▲ 월정리역
머리에 짐을 인 아낙네와 멋진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제법 멋진 노신사들이 오고가며, 사람들로 북적대야 할 기차역이 너무나 조용하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달리는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월정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월정리역은 수줍은 새색시처럼 말없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아파트 한 채 크기도 되지 않을 역사(驛舍)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을 이렇게 버려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 녹슨 열차는 앙상한 몰골을 한 채 수 십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녹슨 철로에는 이름 모를 잡초만이 무성하다. 외로움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폭격을 맞은 객차는 찌그러지고 녹슨 채 한국전쟁을 대변하고 있다. 철의 삼각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북녘의 땅도 평화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상과 정치를 떠나 여기에서만큼은 철책이 남과 북을 오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다. 저 철조망만 없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155마일의 철책선을 따라 우리나라의 동서를 횡단하면서, 국토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 철마는 달리고 싶다
비무장지대에 고라니 한 마리가 평화로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있다. 철책 사이에 난 구멍 사이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노닐고 있다. 아들 같아 보이는 한 병사가 소총을 든 채 초소를 지키고 있다. 저 병사는 몇 시간을 근무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아들도 내년 삼월에는 저 병사처럼, 민간인의 모습을 자유로이 볼 수 없는, 이곳에서(GOP) 일 년을 근무할 것이라고 한다. 제대하면 그때 한 번 물어볼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곳은 평화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현실은 아직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다니 참으로 모순이라는 생각이다.

전망대에서 약 15㎞ 떨어져 있는 제2땅굴 견학은 내게 있어 참으로 충격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문이 있은 후 평화무드가 한창일 때 대남 적화야욕에 눈이 먼 북한이 단단한 화강석으로 된, 깊이 50~160m의 지하에 높이 2m, 총연장 3.5㎞의 땅굴을 팠으며, 군사분계선 남쪽 지점으로 1.1㎞나 더 파 내려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굴은 유사시 한 시간 동안 무장병력 1만 6천여 명이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현장으로, 1973년 11월 20일 최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 2명에 의해서 인지되어, 1975년 3월 25일 발견되었다.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사병 8명은 북한이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순화하기도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안내판 앞에서 그들의 영혼에 묵념을 올렸다.

헬멧을 쓰고 땅굴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떨어져 물을 이루고 흘러간다. 북으로 흐르는 것일까? 우리 군이 땅굴을 찾기 위해 시추한 흔적이 보인다. 땅굴 중간에는 작업을 하던 북한군이 먹고 잤다던 넓은 광장도 있다. 허리를 굽혀 십여 분을 걸었을까. 600미터의 땅굴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더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소총을 든 북한군 형상이 노려보는 모습으로 서 있다. 가슴이 섬뜩하다. 땅굴 벽면에는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철원평야를 관통하는 도로
철의 삼각전망대에서 읍내로 향했다. 차량의 거리계기판을 영으로 돌리고 드넓은 철원평야의 직선도로를 달렸다. 일렬로 선 전봇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길까?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녘은 중학교 때 배운 산촌 강원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게, 높은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재배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4.3㎞를 달려서야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끝을 맺는다. 하지만, 도로의 끝이 아니라, 약간 굽어진 형태로 국도 3번 도로는 계속 이어지고, 넓은 평야는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렇게 넓은 평야를 본 적이 없다.

일곱 시간 반을 차를 몰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멀다. 피곤하지만, 이번 여행의 의미가 가슴 진한 감동으로 영원토록 내 머릿속에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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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즈음 깨달음의 종소리를 들으며
▲ 성문
2005년 여름휴가 때,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 동서남북 사각형의 꼭짓점을 찍고 찾은 곳이 우리나라 역사의 숨결이 가장 많이 서려있는 강화도였다.

그런데 여행 정보 부족으로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 전등사를 관람하지 못하고 귀가한 것이 늘 마음에 빗장이 되었던 터라, 지난 5월 10일 강화도 여행은 내게 있어, 그래서 그 의미가 깊었고 남달랐지 않나 싶다.

전등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여섯 시가 넘어 땅거미가 내릴 때쯤이다. 길고 긴 하루를 끝마칠 무렵에야 도착하여 피로를 좀 풀까 싶었는데, 또 다시 걸음걸이를 재촉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는 전등사를 관람하고 남도에 있는 부안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 전등사로 들어가는 숲길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찰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절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반원형 모양의 성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전등사는 단군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 제130호) 내에 있는 사찰로,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년)에 진나라에서 온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하며,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最古)의 도량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 온 것이 서기 372년이라고 하니, 채 십 년도 안돼 전등사를 창건한 것만 보더라도, 불교의 역사와 도량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삼랑성의 남문을 지나니 소나무 숲길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우거진 숲으로 사방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중요한 사진이라도 몇 장 찍고 싶은 급한 마음에 바쁜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반듯반듯한 길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길 양쪽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길게 달아 놓은 등에서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낮과 밤을 오가고, 때로는 비를 맞으며 매달려 있는 저 등은 수 만 가지 유형의 속세 인간의 어떤 모습을 담고 있을까?

며칠 전, 나이 든 어머니는 절에서 보내 온 시주하는 종이 한 장에 아들과 손자의 이름과 나이를 쓰고 절에 갈 채비를 한다. 그런데, 이름을 쓰는 순서가 큰 아들, 큰 손자 둘, 아들, 그리고 손자들의 순서로 써 내려간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장손이 중요한가 보다.

▲ 윤장대
불당을 향하여 얼마나 걸었을까, 왼쪽으로 화려한 색칠을 한 윤장대(輪藏臺 :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회전축을 달아 돌리도록 만든 것으로,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가 보인다.

"저거 한 번 돌리면 로또 걸린데…."
"야, 그러면 네가 한 번 돌리고 와."

지나가는 몇 명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씁쓸하기만 하다. 물론, 농담이리라 생각하지만, 절에서 만큼은 말과 행동이 물질문명의 편리함과 이기심을 버릴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 무엇을 지키고 있을까?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방문객이 많지 않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돈다. 절 안에도 수많은 등이 걸려 있다. 날은 차츰 어두워져 오는데 한 바퀴 둘러 볼 시간이 촉박하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구석구석 훑어보면서, 전각, 탑, 범종, 건축물의 구조, 그리고 단청 등 사찰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도 해야 하련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관람객들이 전등사의 대표적인 보물인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에서 고개를 젖히고 위로 향한 채 뭔가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놓은 나부상이 보인다. 이 나부상은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고 한다.

▲ 극락왕생

▲ 소원성취
당시 나라에서 이름난 도편수가 대웅보전을 짓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온 그는 아랫마을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아 사랑을 하게 되고, 불사를 다 지은 후에는 같이 오순도순 살기로 약조를 한다.

하지만,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 어느 날 주막을 찾아가 보니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고, 주모를 찾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웃 여자의 말을 듣고는 상심에 빠진다. 도편수는 배반감과 분노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스리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한다.

▲ 명부전
공사가 끝날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잠시, 도편수는 왜 이 나부상을 조각하였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본다.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한 것일까, 아니면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이 깃든 것일까. 후세의 사람들이 이 조각상을 보고 잠시나마 생각을 해 보라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 불심
사찰의 역사가 곧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 온 역사가 아닐까? 학창 시절, 이름난 사찰로 수학여행을 가 본 적이 있다면, 그냥 겉모습만 보면서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 아니었던가?

이런 기억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사찰에 갈 때는 사찰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역시 이번 여행도 시간 탓으로 그냥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화도 전등사에서 호국불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지킴이
▲ 범종각
전등사에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역사공부를 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돼 있는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범종 안내판에 새겨진 종소리의 의미를 내 가슴에 새겨본다.

깨달음의 종소리

종소리 울리면 번뇌는 사라지고
깨달음 하나 둘 허공을 메운다
욕심을 벗고 고집을 떠나서
부처님 마음에 오가라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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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의 미소보다 더 아름다운 꽃살창
▲ 진한 향을 맡으며 천천히 걷고 싶은 전나무 숲길
일상에서 잡념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곳, 일주문(一柱門). 산사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5월 11일 전북 부안땅을 밟고, 내소사를 찾았다.

절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지만, 전북 부안 내소사에 들어가는 느낌은 그 어느 절과는 다르다. 푹신한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나뭇잎사귀가 걸음걸이를 한층 편하게 해 준다.

▲ 보종각
키가 큰 전나무 숲을 보니 밀림지대를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포근하게 느껴지고, 나무 잎에서 뿜어내는 향기는 아름다운 여인의 내음보다도 진하다. 맑은 공기에 취해 크게 심호흡을 하니 정신이 맑아진다. 다른 사람들과 일주문으로 같이 들어갔건만, 그 사람들은 저 멀리 앞서가고 있다.

▲ 내소사를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
앞서가는 사람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갈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에서 만큼은 느릴수록 좋다.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약 5백 미터의 전나무 숲길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단풍나무와 벚나무길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 하늘과 맞닿아 있는 대웅보전
사천왕문을 지나니 대웅전 앞에 뚝하니 버티고 서 있는, 천년이 되었다는, 아주 큰 당나무가 호령이라도 하는 듯하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절을 감싸 안고 있어 포근한 느낌이 두 배로 드는 기분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경내를 한 바퀴 둘렀다.

절의 규모는 대사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을 한 품격 높여 부르는 대웅보전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짐작이 간다.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화음을 이루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노스님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91호).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춰 지은 건물로서, 화려한 다포양식으로 조선 인조11년(1633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배흘림 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형태다. 정사각형 격자 문양으로 마감한 천장의 꽃무늬 단청은 법당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 불심
대웅전 감상의 최고는 정문의 꽃살 창문이다.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꽃으로 장식한 문살의 문양이 하나의 꽃밭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수 백년 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은 탓인지, 지금은 화려한 색깔의 채색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생각할 수 있으련만, 오히려 채색 없는 나무의 결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좋다는 느낌이다. 살며시 만져보니 촉감이 참 좋다.

부처님 공양 중 가장 으뜸이 등(燈) 공양이고, 다음으로 꽃 공양이라고 한다. 새삼 수 백년 전의 그 목수가 생각난다. 얼마나 엄청난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꽃문양 하나하나를 새겨 넣을 때마다 부처님을 생각한 그 불심(佛心)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마, 지금은 또 다른 부처가 되어 이 절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차장 주변으로 몇 그루의 단풍나무가 있다. 그런데 붉은 나팔 모양을 한 꽃잎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처음으로 보는 꽃잎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채 채석강을 만나러 떠나야만 했다.

들녘에는 마늘밭과 보리밭이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저 멀리 희미한 운무 속에서 불어오는 갯내음을 맡으면서 고향 바닷가의 그리운 모습이 오버랩 된다.

▲ 수 백년 동안 떨어지지 않는 꽃잎(좌)/꽃살창 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포근한 미소(우)
내소사에서 약 삼십분을 달리면 채석강을 만날 수 있다. 채석강(彩石江, 전라북도 기념물 제 28호, 면적:12만 7372㎡)은 부안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소로서 격포항 옆에 우뚝 솟은 해안가 닭이봉(달기봉) 아래에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홍보용 안내판의 유래를 보니,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가 물에 비친 달빛에 반하여 그 달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하여 '채석강'이라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격포항 방파제에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방파제 높이도 만만찮아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끝까지 걸으면서 바닷바람을 즐겼다. 제법 길다. 방파제 한쪽으로 상인들이 비닐천막을 치고 멍게, 해삼, 낙지, 키조개, 피조개, 개불 등 각종 해산물을 팔고 있다.

▲ 붉은 꽃주머니를 달고 있는 단풍나무
한 접시에 2만원이면 충분하다. 멍게 한 점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 한 잔 들이키는 맛이 일품이다. 살아가는 인생 하루하루가 이런 맛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욕이리라.

방파제 멀리 희미한 안개 속으로 섬이 하나 보여 옆 사람에게 물으니 위도(蝟島)란다. 한때 이슈가 됐던 핵 방폐장 시설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던 그 섬이 위도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희미한 안 개 속 그 섬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떤 섬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갑자기 그 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 채석강
채석강의 넓적한 바위바닥을 걷고 싶다면,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는데, 이 날 다행히도 물이 빠져 있어, 유람선이 있는 방파제에서 격포해수욕장까지 걸어서 갔다. 수 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한 절벽을 감상하면서, 자연의 신비로움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계속 이어 북쪽 용두산을 돌아 약 2㎞의 해안절벽이 있는데, 그 곳이 적벽강(赤壁江, 전라북도기념물 제29호, 291,042㎡)이다.

물이 빠질 때 시간이 넉넉하다면, 천천히 걸으면서 넓고 평평한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다 생물들의 움직임을 감상하고, 해식동굴에 들어가 억겁의 세월을 느끼는 재미가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 분명하리라. 특히,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어린 아이들은 조개도 줍고 고동도 주우면서 바닷길을 걷는 기쁨은 그 기억이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채석강의 파도소리
층층이 쌓인 검은 빛깔의 바위절벽 위에 뿌리를 어떻게 내렸는지 장엄하게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 언제나 푸른 바다를 보며, 때로는 태풍과 억센 해풍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서 있는 저 소나무야말로 절개의 상징이 아닐까?

검푸른 바다에서 밀려와 바위를 때리며 부서지는 하얀 물보라는 흰색과 검은색의 색깔 대비가 너무도 선명한 모습으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자랑이다. 특히, 간조 때 해식동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채석강의 낙조와 노을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나 환상적이라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다.

거제도에서 멀리 이곳, 두 번을 방문했지만, 낙조를 보지 못한 탓에 다음에는 꼭 하룻밤을 지내면서 낙조와 노을과 밤바다를 구경할까 하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o. 내소사, 채석강 찾아가는 길
. 내소사
- 서해안고속도로->부안나들목->고창방면 23번국도->15.2km -> 보안사거리(우회전)
->30번국도(10km)->석포리 내소사입구(우회전)->2km->내소사일주문
- 부안읍->30번국도로 직진->변산->격포->진서면 석포리 내소사 입구(좌회전)
->2km->내소사 일주문
- 태인IC -> 30번국도(20.5km) -> 신태인 -> 부안읍

. 채석강
-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30번 국도)→부안→변산해수욕장→격포항
- 서해안고속도로 줄포IC→영전(30번 국도)→곰소→격포항
- 호남고속도로 태인IC(30번 국도)→부안→격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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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 내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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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해방을 동시에 품고 있는 섬으로 떠난 여행

▲ 형제바위
섬[島], 제주도나 거제도처럼 너무 커서 섬의 내륙에 들어서면 바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이 안가는 아주 큰 섬이 있는가 하면, 몇몇 주민들이 밭뙈기 몇 평에 채소 가꾸고, 비탈진 산 속에서 염소 몇 마리 키우며, 작은 어선 한 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런 작은 섬이 있는 반면, 해외여행의 대명사처럼 야자수 잎이 출렁거리고 에메랄드빛 바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맑은 바닷물이 있는 파라다이스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섬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섬, 백령도. 삼 년 전 계획을 잡았다가 개인 사정으로 포기해야만 했던, 내게 있어서는 미지의 섬. 창원에서 네 시간 반을 달려 인천에 도착했다. 멀고 먼 길이고 지루한 시간이다. 국토의 끝에서 또 다른 끝으로의 여행이라 차편도 배편도 내게 편하게, 그리고 맘대로 짜여져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욕심을 버리고 배편에 시간을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 백령도 배편이다. 어차피 떠난 여행이라면 즐거움을 더해야 하지 않을까. 여행 첫날, 인천항 유람선을 타고 영종대교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쇼 관람과 선상 불꽃놀이를 즐겼다. 많은 여행객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온다. 아마도 다음날 백령도를 찾아갈 사람들인 모양이다.

▲ 인천대교 건설현장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해병대가 아닐까? 해병대 하면 귀신 잡는 무적의 용사. 해병이 잡는다는 그 귀신을 잡으러 백령도로 향했다. 기적을 울리며 인천항을 떠난 쾌속선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면서 하얀 포말을 내뿜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다 위에 말뚝 같은 것이 여러 개 서 있다. 알고 보니 인천대교 건설현장이다.

한국도로공사의 홍보자료에 따르면, 하늘과 바다와 땅을 연결하는 세계의 관문으로, 세계 5대 장대 해상 사장교로서, 동측으로 경제자유구역인 송도국제도시와 서측으로 동북아의 허브 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세계적인 교량이라고 한다.

그 규모로는 국내 최장대 교량(18.2㎞, 세계 6위 규모), 사장교 주경간장 국내 최대(800m, 세계 5위 규모), 주탑 높이는 230.5m 63빌딩 규모로서, 2009년 10월 준공 예정으로, 본 공사가 완료되면 인천국제공항과 수도권 남부의 제2, 제3경인고속도로를 연결하여 기존 인천공항고속도로에 비해 주행시간을 40분 단축하고, 송도 국제 업무시설단지와 영종 물류관광단지의 건설 촉진 및 가치를 극대화하여 외국자본 투자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 한다.

육지의 고속도로라면 휴게소에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으련만, 휴게소 없는 해상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지루한 시간이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고스톱을 치는 사람, 잠자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선 내외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설책이나 만화책을 가져와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섬 내에 있는 넓은 평야지대
네 시간을 달려 소청도에 도착했고, 삼십 분을 더 달려 백령도 용기포항에 도착했다. 인천항에서 백령도까지 뱃길로 228㎞의 먼 거리다. 출발할 때 화창한 날씨라 너무나도 좋아했는데, 섬에 도착하니 반겨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였다.

우의도 준비하지 않은 탓에 비를 맞으며 걸었다. 설마 뼛속에 물이 들어갈까 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곳에서의 여행수단은 섬 내에 있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든지, 택시나 렌트카를 이용해야만 한다. 시내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관광명소를 다 경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백령도에서 제일 큰 다리로 유명한 백령대교
섬이라고 하지만,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넓은 평야가 보인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남해도, 안면도, 완도,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 큰 섬인 백령도. 십수 년 전, 바다를 매립하여 수십만 평의 농토를 만들었다고 한다. 매립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스물다섯 번째 크기의 섬이었지만, 매립 후에는 여덟 번째 크기의 섬이 됐다.

구수한 토박이 말씨가 정겨운 관광버스 기사님이 쉼 없이 섬 자랑을 늘어놓는다. 백령도에도 서해대교나 영종대교처럼 크지는 않지만, 40t의 하중을 견디는 길이 30m의 백령대교(?)가 있다고 한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여행객 모두 의아한 모습으로 기사님을 쳐다봤지만, 기사님은 살며시 미소 지을 뿐이다. 백령대교는 다름 아닌 제방을 쌓으면서 만들어진 조그만 다리다. 입구에는 진짜 대교에서나 있을 법한 백령대교라는 명패가 보인다.

▲ 콩돌해변의 형형색색의 콩돌

▲ 콩돌해변
섬 내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콩돌해변(천연기념물 제392호)에 도착했다. 오금포 해안을 따라 1㎞ 정도 형성되어 있는 콩돌해변은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 콩알만한 크기의 형형색색 그 모양이 너무나 아름답고, 파리 한 마리 앉지 못할 정도로 반들반들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보니 그 촉감이 너무 좋고 지압 효과도 있어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룬 이렇게 멋진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곳은 어찌 보면 사람 발길 닿기 힘든 백령도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 모른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콩돌을 주워가기 때문에 감시초소까지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 대형버스가 지나가도 웬만한 바퀴자국이 남지 않는 사곶해수욕장
백령도 동남쪽 진촌리 사곶마을 해변에 위치한 사곶해수욕장(천연기념물 제391호)은 길이 3㎞, 폭 300m의 천연비행장 역할을 하는 곳으로, 전 세계에서 이곳과 이탈리아 나폴리 두 곳밖에 없다고 한다. 모랫바닥이 얼마나 단단한지 대형버스가 지나가도 바퀴자국만 남을 뿐, 자동차 운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런 특수성으로 6.25전쟁 때는 천연비행장과 유엔군 작전 전초기지로 활용했다고 한다. 물이 빠진 모래밭에는 조개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입을 벌리고 숨을 쉬고 있는 조개 한 개가 역동적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 두무진
백령도 여행 둘째 날은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다음날, 유람선을 타고 긴장의 바다로 나아갔다. 유람선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어선을 개조한 중간 크기의 배다. 두무진(頭武津, 명승지8호), 선대바위, 형제바위, 장군바위, 코끼리바위 등이 마치 투구를 쓴 장군들이 회의를 하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령도의 북서쪽지역에 있는 최고의 비경으로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관이며, 4㎞의 해안선을 따라 수천 년 풍상에 다듬어진 기암절벽이 늘어선 해안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다.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니 말이다.

▲ 코끼리바위
유람선에 몸을 맡겼다. 나가는 뱃길은 파도에 밀려 배의 요동을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돌아오는 뱃길은 장난이 아니다. 피칭(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과 롤링(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곧 바다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배 앞 선두가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 친다. 여행객들 모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몇몇 파도를 즐기는 이도 있다. 물범 서식지라고 알려진 백령도 앞바다에서 물범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곳 물범은 5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서식하다 중국쪽으로 이동한다는 선장의 설명이다.

귀신은 어디에 있을까? 다음날, 해병부대를 방문했다. 군 관계자로부터 홍보 영상물을 통하여 해병대의 힘든 훈련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해옴을 느낀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멘트가 더욱 가슴을 울리게 한다. 국가 방호시설을 견학하면서 국가안보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소중한 시간이었고, 경험이었다.

지금, 북녘의 바다는 너무나도 평온한데 왜 이런 긴장상태가 계속되어야만 할까?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서해교전이 기억에 떠올랐다. 젊은 장병들의 목숨을 버린 숭고한 정신을 기리지 않을 수 없어 잠시 묵념을 올렸다.

북한의 용연군 월래도와 직선거리는 11㎞. 통일이 되면 작은 통통배로서도 몇 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지금으로서는 갈 수 없는 땅. 안갯속 희미하게 보이는 북녘의 땅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 본다. 귀신 잡는 해병, 그 '귀신'은 아마도 북녘 땅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많은 인민들의 꿈을 좌절시키는 그 세력들이 아닐까? 통일이 되는 날, 귀신은 잡히리라.

▲ 멀어지는 섬, 백령도
2박 3일의 백령도 여행. 쉽지 않은 마음을 먹어야만 갈 수 있는 땅이다. 섬이란 고독과 해방을 동시에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홀로 외롭게 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함께 받기도 하는 곳. 수많은 사람과 관계하고, 편한 물질문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외로움의 세계에 발을 한번 들여 놓기를 권한다. 외롭고 두려운 만큼이나, 매력이 있는 공간, 바로 그것이 섬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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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망산에서 봄을 출산하는 소리를 듣다

▲ 푸른 바다를 힘차게 나아가는 봄을 싣고 달리는 배
봄은 벌써 우리들 곁을 찾아 왔건만, 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이상 기온 탓인지 지난 겨울 얼어붙어 있는 마음이 녹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봄이 출산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무수한 자연의 무리들도 잉태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인간들에게 다가 간다.

▲ 저수지 같은 바다
지난 2월 말,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 할 육십 명의 낯선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몇 주나 몇 개월 동안의 교육훈련은 받아 본 경험이 있겠지만,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의 교육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직장이 있고, 쉼터가 있는 거제도를 떠나 창원에서 합숙교육을 한지 보름여 기간 만에 낯선 사람들과 거제도로 여행. 망산에서 봄이 출산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동행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 거제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병대도
언제나 푸른 바다와 섬 그리고 통통배가 하얀 포말을 만들며 지나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섬 거제도. 거제도의 산은 내륙의 그 어느 산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거제도의 산은 거의 바다의 해수면에서 등산이 시작된다. 비교적 내륙의 산은 해발 몇 백 미터부터 시작되는 반면, 거제도의 산은 등산 시작점이 거의 해수면 가까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해발 오백 미터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팔구백 정도의 높이가 된다. 또 하나의 매력은 산을 오를수록 푸른 바다를 조망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내륙의 산과 다르다.

▲ 힘들게 동료를 따라가며,,,
거제도 남부면에 있는 망산, 해발 397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칠년 만에 산을 오르는 탓인지 숨이 가쁘고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오를 수가 없다. 동료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숨은 헐떡거리면서 마음은 조급해진다. 칠년 전, 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든다. 왜? 삼십 후반부터 전국의 명산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산에 미쳐 있었고, 지리산은 집과 가까워 이웃집처럼 다녔으며, 천왕봉만 백회나 넘게 올랐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욱 더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제 체력이 다 했나, 건강에 문제가 있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외로움
숨은 차오르고 마음은 바쁜데 갈 길은 멀다. 동료들과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발길은 천금만금이다. 몇 번이나 헛발을 짚는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굳어지는데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잠시, 내 등치보다 작은 나뭇가지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내 자신이 한스럽다는 생각이 머리끝에 미치자 갑자기 눈물샘이 솟는다. 축축해 지는 눈가. 그리고 흐르는 물기. 갑자기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단편의 가슴 아픈 기억 하나. 지난 이십대 초반, 어린나이에 몸과 마음이 지치던 군 훈련병 시절, 훈련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쉴 때 흘렸던 그 눈물이 생각났다. 그러나 두 눈물의 느낌은 다르다. 군 시절 그때의 눈물은 부모님을 그리면서 흐르는 눈물이었고, 지금의 눈물은 내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짓누른 것이다.

▲ 오른쪽 중간에 길다랗게 보이는 섬, 장사도. 뱀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칠 부 능선에 오르니 쪽빛 바다색이 너무 찐하다. 그러나 하늘은 정반대로 희뿌옇다. 언제나 두 사물(事物)이 서로 마주하며 영겁의 세월을 같이 해야만 하는 존재인 하늘과 바다. 똑 같이 푸른색이지만 오늘 만큼은 하늘이 창백해 보인다.

▲ 거제의 바다
하얀 물살을 가르며 푸른 바다를 헤쳐 나가는 작은 배가 한 폭의 그림이다. 망산(望山)에는 그림 그릴 소재가 수두룩하다. 절벽을 이루는 큰 바위, 종말종말한 작은 섬, 호수같이 고요한 바다, 힘차게 오가는 어선 등 자연과 인간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미련
지난 해 가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수많은 등산객들을 맞이했던 단풍나무는 내 어릴 적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처럼 힘이 없는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다. 다른 나무들은 두터운 겨울 외투를 벗어 버리고 싱그러운 봄옷을 갈아입으려고 준비를 다한 상태지만, 단풍나무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화려함에 취해 아직도 꿈을 못 깨고 있는지, 아니면 계절 감각을 잃어 버렸는지?

▲ 봄이 출산하는 소리
봄은 지난 해 잉태하여 막 출산준비를 다 마친 모양이다. 바위에 귀를 가까이 대어 본다.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 꿈틀거리는 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온다. 봄이 출산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벌써 와서 곁에 머물고 있었지만 내 자신만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 봄의 하모니
봄은 내 마음속에 있었다. 이제는 내 마음속의 봄을 끄집어내 그 진한 향기를 느끼면서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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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의 여행

삼년 전 여름휴가 때,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 놓고 동서남북 네 개의 꼭짓점을 연결하는 여행을 하고 싶어 집을 훌쩍 떠난 적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거제도를 출발하여 목포, 강화도, 고성군 통일전망대, 부산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전국일주 코스였다. 그런데 목포를 지나 강화도에서 서울을 거쳐 강원도로 향하는데 광복절 연휴를 맞아 피서 나온 차량으로 인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 다른 길을 택하여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운무에 휩싸인 거제도 해금강(海金剛)
지난 5월말, 업무 차 강원도 고성으로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문득, 3년 전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의 아쉬움이 그렇도록 크게 남아서일까? 새벽 네 시, 밤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 잠을 자고서 출장 가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주행거리를 알아보고자 거리 적산계를 제로에 맞추고 출발했다. 희뿌연 안개가 새벽마당에 내려앉고 도로는 축축하다. 먼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된 기분이다. 마산에서 동료 세 명을 더 태우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역시 여행길은 뽕짝음악이 최고인 것 같다. 혹시나 동승한 동료가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물어 보았으나,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다들 좋다고 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차도 덩달아 춤을 추는 것만 같다. 55번 고속국도변에 위치한 치악휴게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치악산 주능선이 보인다.

젊은 나이, 힘들게 군 생활을 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65번 고속국도 종점인 현남요금소를 나와 7번 국도로 접어드니 동해안의 푸른 바다가 반갑게 맞이한다. 장시간 운전으로 쌓인 피로가 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두 번의 휴식으로 일차 목적지인 속초에 도착했다. 600㎞에 여섯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는 주황색 지붕의 아름다운 집들이 그림처럼 보인다.
고성으로 향하는 길은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26년 전 군 생활을 원주에서 근무했고, 당시 강원도 전역을 돌아다녀야만 하는 보직을 맡았기에, 동해안 바닷가로 펼쳐지는 풍광은 현대식 건물만 몇 개 달라 보였을 뿐, 그 옛날이나 별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바닷가에 쳐져 있는 철조망은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동해안 바다를 감시하는 듯 하다.

동해안 해수욕장은 모래만 있는 게 아니다. 언제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지, 잘 생긴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풍치를 한층 더하고 있다. 아마도 몇 십 년이 지나면 아름드리 큰 소나무와 깨끗한 모래와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되어 동해안을 널리 알릴 것이 틀림없을 것만 같다. 분재로만 보아 오던 소나무의 고고함과 잘 생긴 모습은 동해안 도로변 산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 동해안 바닷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 모내기 한 논 뒤쪽으로 보인다.

▲ 최북단 대진항.
통일전망대를 가기 위해 출입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몇 분 지나자 ‘여기서부터 민통선입니다’라는 아치형 간판이 보인다. 헌병들이 검문하는 모습을 보니 느낌이 다르다. 신분을 확인하고 민통선을 통과하니 적막한 느낌과 함께 긴장감이 감도는 것 같다. 저 멀리 해안선 철책으로 군인들이 순찰을 돌고 있지만 바다는 평온한 모습이다. 민통선 안에서도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나만 긴장한 탓일까? 조금 더 지나니 남북교류사업의 일환인 철도건설 작업이 한창이다.

▲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도로에는 아직도 보안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조국 분단의 아픔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부산시 중구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까지 이르는 7번국도. 남한의 길이만 하여도 505.9㎞로서, 북한까지 합치면 1200㎞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안에 드는 긴 도로이다. 도로의 약 90%를 동해안 바닷가를 조망하며 우리나라 최북단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의 마지막 지점. 차는 더 이상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갈 수 없다. 달리는 차도 없다. 더 이상 길 안내가 필요 없는 도로변에 홀로 서 있는 녹색표지판.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통일전망대의 낮과는 달리 밤새 북녘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을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 7번국도 남한지역의 마지막 지점. 자동차는 언제쯤 북한의 종점까지 갈 수 있을까?
통일전망대, 조국 단절의 아픔을 기억하고 통일염원을 담은 곳으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해발 70미터 고지위에 있다. 일반여행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대부분으로 대형버스가 주차장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북녘의 하늘과 땅과 바다. 모두 고요하다. 남한의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왜 다르게 보였고, 보일까? 자연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달라서일까? 혼란스런 마음으로 한 동안 북녘의 곳곳을 침묵으로 응시한 채 바라본다.

▲ 통일전망대. 오유월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북적인다.
해금강(海金剛), 바다의 금강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남해바다에 떠 있는 명승 2호 해금강과 북녘의 땅 동해바다 떠 있는 해금강.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불과 5㎞ 앞으로 펼쳐진 바다가 북한의 해금강이다. 푸른 바다가 닮았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흡사하다. 형제라고 이름을 붙여 줄까? 유람선을 타고 이름 모를 작은 섬을 돌며 해금강의 바닷물에 손을 적시면서, 바다 속을 구경하고 싶다.

▲ 북한의 해금강. 깨끗한 모래사장,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지?

▲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한의 바다.
금강산을 육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고작 백일에 불과하다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행운인지, 금강산의 신선대와 옥녀봉 등 바다의 만물상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고 그 아래로는 조국분단의 아픔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철책선과 비무장지대,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관광의 길을 볼 수 있어서 통일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새기게 한다. 아! 그리운 금강산이여! 언제쯤이나 아름다운 해금강과 금강산을 내 집 드나 들 듯 구경할 수 있을는지?

▲ 낮과 밤이 없이 북녘을 바라보며 무슨 염원을 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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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성 북문루 상량식 현장을 찾아서

급속하게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가 아쉬운 이 때, 고현성(경남 거제시 소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북문루’ 중수공사에 따른 상량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현장을 찾았다. 대청마루에는 상량에 쓰일 목재와 간단한 제례음식이 차려져 있고, 흰색의 깨끗한 광목이 상량을 들어 올리도록 깔끔하게 묶여 있다.

▲ 마룻대에 쓰는 첫 글자, 용(龍)자.
상량식은 집을 지을 때 기둥위에 보를 얹고 마룻대를 올리는 것이다. 집을 다 짓고 난 다음 축연을 베푸는 준공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중요한 의식으로, 이날은 술, 떡, 돼지머리, 북어, 백지 그리고 실 등을 준비하여 주인과 목수 일꾼 등이 새로 짓는 집에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신(地神)과 택신(宅神)에게 제사지내고, 지나가는 행인을 초청하여 축연을 베푼다.

▲ 마룻대에 글씨를 새기고 있다(왼쪽), 교육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윤종인 선생(84세).
상량기문은 정성스레 갈은 먹물을 듬뿍 묻혀 붓으로 쓰는데, 쓰기에 앞서 백묵으로 마룻대에 칠을 한 다음 쓰면, 먹물이 퍼지지 않아 선명한 글체를 볼 수 있다. 보통은 용(龍)자와 구(龜)자 사이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고 쓰는데, 용자는 거꾸로 쓰서 구자와 마주보게 하며, 이때, ‘입주’를 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용(龍)자와 구(龜)자를 쓰는 것은 용과 거북이가 수신(水神)이므로 화재를 예방해 주리라는 속신에서 비롯된다. 그 다음 밑으로 두 줄로 '응천상지오광(應天上之五光), 비지상지오복(備地上之五福)'이란 글귀를 넣어 축원의 뜻을 담기도 한다. ‘오색 하늘빛이 감응하고, 오복을 땅이 준비하다’라는 뜻이다.

마룻대에 글씨를 다 쓰고 나면, 마룻대 앞으로 제상을 차리고 주인이 엎드려 제를 지내는데 이때 상량문을 크게 낭독한다. 상량문이 장문일수록 주인이 엎드려 있는 시간도 그 만큼 길어 벌(?) 아닌 벌을 받기도 한다.

▲ 거제향토사연구소 박병희 소장(81세)이 상량문을 낭독하고 있다.
상량문 낭독이 끝나면 주인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술을 따르고 절을 하면서 부귀공명을 기원하고, 술을 집 네 귀퉁이에 조금씩 부어 축원한다. 마룻대에는 실로서 북어와 떡을 묶어 놓는데, 이것은 나중에 목수와 인부들이 떼어 먹는다. 이어서 흰 광목으로 묶은 마룻대를 올리는데, 이때 목수나 주변의 사람들이 “잘 올라가지 않는다”라고 하면, 주인이 돈을 내 놓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돈은 공사인부들이 술 한 잔 하면서 이날 하루 쉬기도 한다.

▲ 주인이 술을 따르고 절을 한다.
▲ 마룻대를 올린 후 정리하고 있다.
상량문(上樑文)은 집을 짓게 된 경위나 사유 등을 기록한 문서로서, 한지에 한자를 많이 섞어 쓰는데, 흰 봉투나 대나무 통에 넣어 종도리에 홈을 파 따로 넣어 밀봉하고, 밀봉 후 ‘상량문재중’이라는 글씨를 써서 표시를 해 놓아둔다. 몇 백 년이 지나고 건물이 노후하여 중수 할 때 건축을 하게 된 역사를 알 수가 있다. 상량문이 명문이라면 나무판에 새겨서 대청 한쪽에 자랑스럽게 걸어 두기도 한다. 누구나 그 명문을 읽게 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 상량문(上樑文)을 봉함한 표시.
▲ 상량문(上樑文).
상량식을 다 마치고 나면 음복하고 떡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차츰 전통양식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전통적 의식을 갖춘 상량식을 구경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구세대라고 지칭 받는 나이지만, 관심이 없어서일까, 집안 제사상 차릴 때도 매번 책을 펴 놓고 볼 정도로 익숙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배우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고현성 북문루 상량문 전문이다.

고현성 북문루 상량문(古縣城 北門樓 上樑文)

고현성(古縣城)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9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818m, 높이 2m, 폭 5.5m로서 면적은 10,971㎡이다.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6호로 경상남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고현성은 문종원년(1451년)에서 단종원년(1453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성곽의 형태와 구조는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장대지 위에 평면의 선형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운옹성과 치·해자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전기 읍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근역(槿域)의 사천여년(四千余年) 역사(歷史)와 더불어 우리시가 오늘에 이르기 까지 장구(長久)한 세월 역사(歲月 歷史)의 변천(變遷)과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시대(時代)의 변화(變化)로 고을의 읍중(邑中)이었던 고현(古縣)은 근대사(近代史)에서 지방(地方)의 면소(面所)로 출장소(出張所)로 퇴락(頹落)하게 되었으나 광음여류(光陰如流)는 드디어 암흑(暗黑)의 시대(時代)는 가고 광명(光明)의 시대(時代)가 도래(到來) 민족(民族)의 염원(念願)인 해방(解放)의 환희(歡喜)를 맞이하였고 그리하여 통영군(統營郡)에 병합(倂合)되었던 군(郡)이 복군(復郡) 됨으로써 면(面)에서 읍(邑)으로 군청소재지(郡廳所在地)로 바뀌고 행정제도 개혁(行政制度 改革)에 의(依)하여 시(市)로 승격(昇格)함에 따라 급속(急速)한 발전(發展)으로 고을 중심도시(中心都市)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과정(過程)에서 고현성(古縣城) 역시(亦是) 온전(穩全)할 수가 없었다.

상고(詳考)해 보면 고현성(古縣城)은 조선왕조 문종 원년, 신미(朝鮮王朝 文宗 元年, 辛未)부터 단종 원년, 계유(端宗 元年, 癸酉)사이에 축조(築造) 되었고 둘레가 3038척 높이 13척의 석축성(石築城)이었다. 그 이래로 임진(壬辰)의 병화(兵禍)와 변전(變轉)하는 풍상(風霜)을 견디며 성곽(城郭)은 유지(維持)되어 왔으나, 1950년 6·25 사변(事變) 때 고현리(古縣里)를 비롯하여 문동리·상동리·장평리·양정리·수월리·연초면 임전지역(門東里·上東里·長坪里·良井里·水月里·延草面 荏田地域)의 전주민(全住民)을 미군(美軍)이 강제(强制)로 철거이주(撤去移住 )시키고 그곳에 유엔군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가 설치(設置)됨으로서, 현대식 중장비(現代式 重裝備)에 의(依)하여 향사(鄕史)에 빛나는 성곽(城郭)은 극심(極甚)하게 파괴(破壞)되었고 성지(城址)조차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었다.

1953년 휴전협정(休戰協定)으로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를 철수(撤收)함으로써 이주민(移住民)들이 속속복귀(續續復歸)하였고 토지구획정리(土地區劃整理)를 실시(實施) 농지기반조성 (農地基盤造成)과 아울러 도시계획(都市計劃)으로 시가지(市街地)를 정비(整備)하니 시(市)의 중심도시(中心都市)로 발전(發展)하였으나 많은 시민(市民)들은 고현성(古縣城)이 형지(形址)도 없이 살아지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그 일부(一部)나마 복원(復元)을 갈망(渴望)하는 시민(市民)의 여론(與論)이 날로 비등(沸騰)하는 실정(實情)이다.
문화유산(文化遺産)은 인류(人類)의 보편적 가치(普遍的 價値)로서 옛 선철(先哲)은 문화유산(文化遺産)이 없는 고을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沙漠)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 고을은 지리적(地理的)으로 해중(海中)의 도서(島嶼)로서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문화(文化)가 매우 낙후(落後)되어 후진(後進)을 면(免)치 못하였다. 그러나 양대조선소(兩大造船所)의 성업(盛業)으로 근대산업(近代産業)의 발달(發達)로 인구(人口)의 증가(增加)와 육지(陸地)와의 교통망(交通網)은 도서(島嶼)라는 편견(偏見)을 불식(拂拭)하게 되었고, 나아가 문화(文化)에 대한 시민(市民)의 정서(情緖)가 새롭게 일어나고 누문(樓門)을 복원(復元)하자는 공론(公論)의 일치(一致)로 김한겸 시장(金汗謙 市長)은 도비지원(道費支援)과 시비(市費)를 확보 길일양신(確保 吉日良辰)에 새 터에다 누각(樓閣)을 세우니 신명(神明)의 보우(保佑)련가 어느 듯 모든 공역(工役)이 끝나 윤환(輪奐)이 빛나며 뜻이 있는 이는 마침내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이 점차(漸次)로 많이 보존(保存)되어 있어야 유서(由緖) 깊은 고읍(古邑)으로서 명승지(名勝地)가 될 것이다.

이제 긴 대들보를 들어 감(敢)히 칭송(稱頌)하는 글을 올리고자 한다.
어기여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대명의리(大明義理) 붉은 해가 동방(東方)에 떠오르니 소소(昭昭)한 이 속에 천기(天機)가 있으니 그 뜨고 잠김에 일리(一理)가 같다.

어기여차 들보를 서(西)쪽으로 던지니
회진(灰塵) 옛 마을 하늘의 문성(文星)과 응(應)했도다. 때를 위(爲)해 문명(文明)의 상징(象 徵) 나타났으니 많은 현인(賢人) 일어 나 시민대중 계발(市民大衆 啓發)하리

어기여차 들보를 남(南)쪽으로 던지니
가라산(加羅山)에 상서(祥瑞)로운 운하(雲霞)가 끼었다 바라보니 뭇 봉우리가 그림같이 아 름답고 하늘빛 구름 빛이 이 속에 잠겨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北)쪽으로 던져보니
계룡산(鷄龍山)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여맥(餘脈)인 우리고을 진산(鎭山)이라 상운(詳雲) 이 창망(滄茫)한 빛을 가리었네.
칠요(七曜)가 분명(分明) 그 사이에 개재하고 뭇 별이 낱낱이 북극(北極)에 귀향(歸向)하리.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로 던져보니
넓고 큰 하늘에 삼광(三光)이 밝았구나. 찌꺼기 모두 씻고 서로가 융화(融和)하면 이 고장 의 시민(市民)들 마음도 저와 같이 높고 밝으리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져보니
저 아래 고현천(古縣川) 흐른 물 쉬지 않고 줄줄 근원(根源)이 있어 끝없이 이어가니 쉴 새 없이 순화(醇化)를 일으킨다.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上樑)한 뒤에 산수(山水)는 맑은 기운(氣運)을 도와주고 음침(陰沈)한 음기(陰氣) 사라지고 완고(頑固)한 사람 청렴(淸廉)해지게 하소서 삼가 의리(義理)와 이익 (利益)에는 취(取)하고 버리는 것을 반드시 밝게 살피며 부정(不正)과 정의(正義)는 옳고 그 름으로 밝히게 하소서

西紀 二千六年 五月 十八日

晩仁 朴丙熙 撰
素庭 尹鍾潾 書
 
Posted by 죽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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