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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지역

누가 그랬을까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채 피는 선운사의 꽃무릇

  
▲ 백양꽃 백양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백양사

누가 그랬을까, 누가 말했을까,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살아있는 생명이 잠시 쉬어야 할 시간인 겨울로 가는 긴 여정 앞에 잠시 들르는 가을. 그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는 9월의 마지막 날, 전북 고창으로의 가을 여행길에 올랐다.  

높고 푸른 하늘과 새털 같은 하얀 구름은 정처 없이 어디론가 홀로 떠돌아다니는 방랑시인 김삿갓 같기도 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바퀴의 시끄러운 소음도 가을 분위기 탓인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무척 쾌청한 날씨라 농부의 가을걷이 모습도 눈에 띌 법도 하지만, 들녘은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고요하다. 

  
▲ 읍성내 소나무 읍성내에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소나무가 가을하늘을 덮고 있다.
소나무

몇 해 전, 먼 길을 빙 둘러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고창담양선 고속도로 개통으로 훨씬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고, 그만큼 시간도 늘어나 마음의 여유도 넉넉하다. 고창읍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세월의 흐름을 같이하며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읍성 입구에 들어서니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모양성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자연석 성곽인 모양성(牟陽城)은 고창읍성의 다름 이름이다. 

  
▲ 고창읍성 읍성에 오르면 고창읍내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다.
고창읍

평일임에도 사람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답성놀이를 하고 있다. 안내 간판에는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적혀있다. 성 밟기는 저승 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좋고,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왁자지껄한 단체 여행객 한 팀을 따라 성을 돌았다.  

  
▲ 고창읍성 성곽 성곽에는 강아지밥풀이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고창읍성

  
▲ 가을향기 성내에는 가을향기가 널려 퍼져 있다. 뒤로 보이는 작청이라는 건물은 조선시대때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이다.
고창읍성

그 누군들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하고 싶은 욕심이 없을까.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아낄 겸, 성곽은 한 바퀴만 돌고 성내를 둘러보았다. 성안에는 동헌, 작청, 옥(獄), 풍화루, 지석묘, 고창객사, 척화비 그리고 공북루 등 성 안 곳곳에는 지방문화재가 많이 있어 역사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만 같다. 야생화와 억새가 함께 어우러져 핀 성내에는 가을향기가 널리 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선운사로 가는 도로변의 황금들녘 선운사로 가는 길에 가을이 무르있었다. 보는 것만 하여도 행복으로 충만하는 느낌이다.
황금들녘

선운사로 향하는 도로변은 가을이 한층 더 여물었다. 하늬바람 덕분일까. 여름을 보내고 서풍을 맞이하면 곡식이 여물고 대가 세어진다는 '하늬바람에 곡식이 모질어진다'라는 속담이 실감난다. 황금빛 들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잠시만이라도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을 비우고 일상을 떠나 자연을 즐기는 편안함이 이래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늬바람에 출렁이는 억새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다. 황금들판 너머 큰 바위산이 풍요로움을 즐기는 듯 내게 손짓을 하고 있다.  

길 옆 작은 마을의 오래된 상점 간판이 정겹다. 추억을 되돌려 놓는다. 잠시 내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냥 통과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다시 돌아가 추억을 담아 가고 싶었는데, 일행이 있어 끝내 말을 못하고 말았다. 먼길이지만, 언젠가 다시 와서 찍어야 되겠다는 나와의 약속만을 머릿속에 남겨둔 채 가던 길을 재촉했다. 

  
▲ 선운사 꽃무릇 선운사 입구에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꽃무릇이 붉게 피어있다.
꽃무릇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석산(石蒜)이라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의 종자구입이었다. 다른 말로 꽃무릇이라고 부르는 이 꽃은 명품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곱디고운 꽃이다. 고창 선운사의 가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꽃무릇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전국의 사진작가와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꽃무릇은 9월 중순경부터 꽃을 피우고 10월 중순 무서리가 내리면 새파란 잎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 겨울을 나게 하는 특별한 꽃이다. 고고히 홀로 피는 자태는 양귀비의 고귀함보다 아름답고, 무리지어 피는 화려함은 환장하리만큼 황홀하다. 

응달진 곳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꽃을 피우는 꽃무릇은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오후쯤이면 그 화려함은 절정을 발하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듬뿍 안겨주는, 가을을 대표하는 사랑받는 꽃으로 유명하다.  

몸은 하나지만 꽃과 잎이 같이 피지 않아 서로 영원토록 만나지 못하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꽃. 상상화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아주 먼 옛날, 절에 기도하러 온 예쁜 처녀가 스님을 사모하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뒤 절터 곳곳에 붉게 피어났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기다림은 영원히 만남으로 이루지 못하고, 그리움만으로 남는 것 같아 슬프기만 하다. 스님을 얼마나 그리워하였으면, 부도 옆에서도 활짝 피어 웃고 있을까. 

  
▲ 산신당 지킴이 꽃무릇 슬픈 전설을 간직한 채 핀 꽃무릇은 오늘도 그리움을 듬뿍 안고 있다.
산신당

살짝 건드리기만 하여도 꺾일 듯 한 연약한 꽃대는 가냘픈 처녀의 몸이고, 꽃잎은 스님을 애타게 그리는 간절한 사랑의 눈빛이런가. 그래서일까, 선운사 산신당 문지방에 꽃무릇 다섯 송이가 애타는 모습으로 피어있다. 아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면서도 매년 같은 시기에 저렇게 스님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화의 슬픈 전설을 알아버린 연유일까, 문지방에 핀 꽃무릇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 만세루 천왕문과 대웅보전 사이로 만세루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만세루

선운사 마당은 다른 절보다 더 넓은 것 같다. 절 마당에 긴 장방형의 누(樓)라는 이름을 붙인 만세루가 있는데, 실제로는 2층의 누각이 아닌 낮은 단층 건물로서 천왕문과 대웅보전을 연결하는 선상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만세루가 절 마당 중간에 있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궁금해서 스님에게 물었는데, 대웅보전 쪽으로는 벽체를 두지 않고 개방하여 대웅보전과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법회가 있을 때 큰 스님의 법어를 듣는 강당으로 사용된다고. 

  
▲ 목어 물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목어
목어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을 범종각 한 곳에 같이 모셔 놓은 것도 다른 많은 사찰과는 달리 눈에 띄는 점이다.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고,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며, 공중을 날아다니고 허공을 떠도는 영혼과 물속에 사는 중생까지도 제도하기 위한 불전사물을 보면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란 마음으로 한 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겨울에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길목인 가을. 늦은 오후의 산사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불전에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외롭지가 않다. 가을을 느끼고 싶어 산사를 찾았건만, 가을의 그리움만 가득 안고 또 다시 속세로 돌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일상의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깊이 드는 까닭이다. 누가 말했을까, 누가 그랬을까,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