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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지역

가을 소개팅을 하러 진도로 떠나다


거제 바다와 진도 바다의 또 다른 가을 느낌

  
▲ 늦가을 진도의 바다 거제도에서 310km를 달려 도착한 진도. 안개에 휩싸인 진도대교가 늦가을을 품에 안고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
진도대교

바닷가에서 태어나 반세기 동안 바다를 보고 살아왔지만, 매일같이 바라보는 바다는 하루도 같은 느낌이 아닌,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바다를 사랑하게 됐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게 사랑할 것만 같다.  

가을은 깊어 가는데, 화려하게 치장한 단풍이 물든 산보다는 비릿한 냄새가 나는 바다가 더 좋다. 내 삶의 터 거제의 바다가 아닌, 또 다른 삶이 묻어 있는 바다를 보러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최남단의 섬인 진도로 향했다. 몇 달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진도였지만, 미루고 미루다 가는 여행길은 희뿌연 안개만이 안전운행을 일깨워 줄 뿐이다. 

  
▲ 쌍계사 국화축제 진도의 쌍계사에선 국화축제가 한창이다.
쌍계사

11월 첫 주 일요일(2일). 아침 일찍 거제에서 310㎞를 달렸고, 세 시간 반을 넘겨서야, 진도대교를 볼 수 있었다. 안개에 휩싸인 사장교의 진도대교는 휘황찬란한 야경사진에서 보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우뚝 솟은 주 탑은 웅장하였고, 언뜻, 거미줄 같아 보이는 로프는 육중한 상판 때문이었는지, 힘에 겨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마, 그런 느낌은 장시간의 운전으로 인한 피곤한 육신 때문이었을까. 동시에 느끼는 착시와 착각 현상의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리 밑은 초속 11노트(6m)의 빠른 조수가 흐르고, 동양에서 바다 물살이 제일 세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해남과 진도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이순신이 왜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친 명량대첩지라 불리는 유명한 울돌목이다. 

유람선터미널로 전화를 걸었다. 유람선은 오전·오후 각 한 차례 운항하고, 10명 이상 되어야만 출항한다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점심을 미루고 쉬미항에 도착했다. 자동차는 제법 많이 주차돼 있었지만,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은 한산했다. 현장 분위기로 봐서 배는 출항하지 않을 것만 같았고,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안개 낀 날씨로 차라리 유람선이 운항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시야가 흐려 사진촬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 강아지 삼형제 새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삼형제가 지친 탓일까 곤히 잠들어 있다.
진도

다시 돌아서 읍내로 나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 운이 좋게도 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역시, 시골장터 만큼은 볼거리가 풍성하다. 풋풋한 정이 흐르고, 서로 싸우듯이 흥정하며, 왁자지껄한 장터의 모습에서 삶의 의미를 보고 느낀다.  

형제처럼 보이는, 새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세마리는 지친 탓일까,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귀엽고 정겹기만 하다. 한 달여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애견 선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이별에 대한 슬픔과 애절함이 가슴을 죄어 오는 것만 같아 더 이상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 녹색의 땅 섬사람들의 부지런함을 느낄수 있는 들녘이다.
녹색의 땅

섬사람들은 근면성을 타고 난 것일까? 몇 해 전, 남해를 갔을 때도 겨울철에 노는 땅을 볼 수가 없었다. 마늘을 심은 들판은 녹색의 땅이었고, 근면과 성실의 현장이었다. 진도 역시 대파와 배추가 심겨진 들녘에서 섬사람 특유의 부지런함을 느낄 수 있었다. 

  
▲ 운림산방 허련선생의 화실
운림산방

예까지 왔으니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아니 보고 갈 수는 없다. 깊어 가는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명소라는 생각이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허련선생(1809년~1892년)이 말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곳 작은 연못에는, 가을이 수면에 넉넉히 내려앉아 포근히 쉬고 있다. 수면 위에 자연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일필휘지의 힘도 느껴지지만, 곡선의 부드러움은 그 시대 가을 놀이하는 여인의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같은 느낌도 든다. 

  
▲ 자연산수화 진도의 대표적인 명소로 운림산방의 작은 연못. 수면은 화선지요, 물감은 자연이며, 붓은 하늘로 그린 연못위의 그림 한점. 허련선생은 이 연못에서 그림의 영감을 얻은 듯만 하다.
운림산방

연못 위 그림 한 장. 수면은 화선지요, 물감은 자연이며, 붓은 하늘이다. 연못 위 자연이 그린 그림을 본 때문일까. 소치기념관에서 감상하는 선생의 작품은 조금 전, 연못에서 본 잔영이 그대로 남아 실제 그림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선생은 당시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겠지만, 영감(靈感)은 연못에서 느꼈으리라.  

매주 토요일 11시,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진도역사관에서는 유명작가들이 그린 한국화, 서예 그리고 문인화 등을 경매한다는 안내를 듣고서야, 차라리 토요일에 방문하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 대웅전 진도 쌍계사 대웅전앞에 국화가 만발하다.
쌍계사

  
▲ 분재국 처음 보는 분재국.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의 국화에서 핀 수 백 송이의 꽃은 지극정성의 결실이다.
국화분재

쌍계사는 하동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도에는 또 다른 쌍계사가 있었고, 이곳에선 국화대축제가 한창이었다. 사찰은 규모면에서 하동보다 크지 않지만, 고풍스러움만큼은 못지 않아보였다.  

엄지손가락 굵기보다 더 큰 분재국의 가지에서 핀 수백 송이의 국화는 일 년 내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동물 모양의 소원등과 국화가 어우러진 쌍계사의 가을은 긴 겨울잠을 자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신비의 바닷길 매년 4~5월이면 뽕할머니상에서 오른쪽 안개에 싸인 모도까지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다.
신비의 바닷길

상큼한 국화향기를 뒤로하고 신비의 바닷길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뽕할머니상에서 바닷길이 열리는 모도(茅島)를 바라보니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제법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들 물이라 수심도 꽤 깊어 보였는데, 바닷물이 갈라진다고 하니 신비스럽기만 하다. 바닷길은 매년 4~5월에 3~5회 정도 열리며, 길이 약 2.8㎞, 폭 약 40m라고 한다.  

잠시 후, 대형 관광버스 두 대가 부산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술시가 지나고 술 마신 기운 탓인지 여행객은 시끄럽기 짝이 없다. 아저씨부대는 포장마차로 향하고, 아줌마부대는 한 할머니가 작업하고 있는 김 건조장으로 향한다. 할머니가 파는 곱창김은 금세 동이 났다. 1미터가 넘는 곱창김은 곱창처럼 꼬불꼬불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진도에서 만난 할머니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에서 어미같은 할머니가 곱창김을 다듬고 있다.
신비의 바닷길

파도가 밀려간 듯 여행객들이 철수한 조용한 시간, 할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올 해 일흔 아홉이라는 할머니는 정정해 보였지만, 힘겨운 모습도 함께 보였다. 남편은 쉰셋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넷은 모두 잘 산다고 한다.  

아직 일을 할 수 있으니, 놀지 않는다면서, 오늘 하루 동안 한 봉지 만원하는 김을 스무 개 정도 팔았다고 한다. 어미 같은 생각에 기꺼이 한 봉지를 샀고, 집에 와서 무쳐먹었더니 맛이 기가 막힌다. 아마도 할머니가 힘들게 노력하고 정성을 들인 손맛과 신비의 바닷길이 만들어준 마력이 더해져 좋은 맛을 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도의 바다는 그렇게 나의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여행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소개팅이라고 말하고 싶다. 청춘남녀가 소개팅을 하려면 키는 얼마이고, 몸매는 어떠며, 외모는 잘 생겼는지, 성격은 괜찮은지 등등, 먼저, 상대방에 대하여 궁금한 것을 대략 알아보고 만나듯, 여행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가고자 하는 곳, 가보고 싶어 하는 곳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해가 있어야 만이 한층 더 품격 있는 여행이 되지 않겠는가. 

스스로 구세대라 생각하는 지금이다. 청춘시절, 소개팅을 해 본 경험이 없어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는 전국을 대상으로 여행 소개팅을 하러 떠나고 싶다.